[탈북가족 기자회견]탈출경로 재구성

  • 입력 1996년 12월 17일 20시 00분


《金慶鎬(김경호)씨 일가족의 북한탈출 경위가 17일 이들의 기자회견을 통해 좀더 확실히 드러났다. 회견내용을 중심으로 이를 재구성한다.》 김경호씨 일가의 탈북드라마는 지난 7월 중국 연변(延邊)의 한 조선족동포 집에서 김씨의 부인 崔賢實(최현실)씨가 친정어머니 崔正順(최정순·재미교포)씨를 48년만에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지난 48년 큰 딸(현실씨)과 아들을 친척에게 맡기고 남편 崔暎道(최영도)씨와 함께 월남했던 최정순씨 부부는 92년8월 처음으로 딸네 가족과 소식이 닿은 뒤 편지를 왕래하며 힘닿는대로 돈을 부쳐주었다. 어머니 최씨는 딸과의 상봉을 마치고 무거운 마음으로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때마침 여름 폭우로 물이 불어나 두만강을 건널 수 없게 된 딸 현실씨는 뉴욕의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고 어머니는 즉각 날아와 연변에서 딸과 두번째 만났다. 여러날을 같이 보내며 북한에서의 서럽고 힘든 생활상을 들은 어머니는 『할 수만 있다면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해 보라』고 권유하며 경비에 쓰라고 8천달러(약 6백70만원)를 내놨다. 부모를 만나고 싶은 심정만으로 연변에 갔던 최현실씨는 『지옥같은 북한세상에서 더 살 수 없다』고 결심했다. 한달반 동안 연변에 있다 함북회령 집에 돌아온 현실씨는 남편에게 전말을 전한 뒤 두 아들과 세 딸을 불러 놓고 탈북 결심을 밝혔다. 89년 중풍으로 쓰러져 말을 못하는 남편 김씨는 눈물만 흘렸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이란 옛 주소를 적어 놓고 자녀들에게 『통일이 되면 너희들이라도 꼭 고향을 찾아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온 아버지를 봐온 자녀들도 『아버지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다. 같이 가자』고 나섰다. 그러나 사위들에게만은 탈출을 시도하기 직전까지 숨기고 최후순간에 설득하기로 했다. 사위들도 장모의 눈물어린 설득과 아내들의 단호한 결심을 따랐다. 구체적 탈출계획이 조심스레 다듬어져 갔다. 장남 금철씨(30)는 친한 친구인 회령시 사회안전부 경비노무자 최영호씨를 이 계획에 끌어 들였다. 6가족, 총원 16명이 탈출하는데는 경비노무자의 치밀한 준비와 도움이 있어야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평소 미국에서 온 돈의 일부를 헐어 최영호씨를 도와 주었던 덕분인지 경비노무자 최씨는 호의적이었다. 금철씨와 차남 성철씨(26)형제가 10월23일 연길(延吉)시에 도착, 현지에서 대기중이던 외할머니 최정순씨를 만났다. 최씨는 뉴욕에 사는 며느리 이정희씨(최현실씨 올케)와 함께 16일 연길에 먼저 도착, 일가를 위한 숙소와 옷가지를 마련하고 길을 안내해줄 조선족을 물색하는 등 사전준비를 갖췄다. 어머니한테서 전해 들은 탈출계획을 직접 확인해야 겠다며 달려온 금철 성철씨 형제는 처음 만난 외할머니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모든 의문이 풀렸다. 중국측 통로와 조선족 안내원 및 준비상황 등을 확인한 형제는 25일 북한에 돌아가 사전약속대로 경비노무자 최씨를 북한쪽 두만강변에서 만나 최종계획을 점검했다. 몇시간 뒤 최현실씨는 경비노무자 최씨로부터 『오늘 건너면 일없다(괜찮다)』는 연락을 받고 일가를 밤 8시 장남 금철씨 집에 모이도록 했다. 중풍환자에 임신부와 세살바기 어린이 둘, 3녀 명숙씨는 맹장수술 후유증으로 고생중….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머뭇거릴 수 없었다. 10월26일 새벽 0시가 넘자 1,2진으로 나누어 20분 간격을 두고 두만강으로 출발했다. 눈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거셌으나 탈주에는 오히려 안성맞춤이었다. 보행이 불편한 김씨는 두 아들이 부축했다. 어린애들이 문제였다. 울음소리라도 나면 큰일이다. 애들에게 수면제를 먹일까, 큰 함지박에 넣어 갈까 궁리했지만 그냥 부모들이 들쳐업었다. 2시간여만에 두만강변에 도착했다. 강변에서 안전원 최씨가 30여분간 경비상황을 살필 동안 가족들은 납작 엎드려 있었다. 새벽 4시. 강건너에서 회중전등 불빛이 몇차례 비쳤다. 미리 약속된 조선족 안내원들이 보낸 「건너오라」는 신호였다. 두만강을 건넜다. 물은 어른 배에 차는 정도였다. 가족들은 옷을 입고 건너려 했다. 최현실씨는 깜짝 놀라며 말렸다. 최현실씨는 『모두 바지를 벗으라. 건너가서 바지가 물에 젖어 있으면 의심받는다』며 먼저 바지를 벗어들고 건넜다. 일가는 용정(龍井)에서 연길을 거쳐 기차로 심양(瀋陽)까지 가서 20일간 머문 뒤 바뀐 안내자를 따라 북경(北京)으로 갔다. 북경에서 연변조선족 관광객으로 위장하기 위해 천안문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기도 했던 이들은 다시 기차를 타고 광주(廣州)로, 전세버스로 심천까지 갔다. 그리고 미리 수배해 둔 밀수선을 타고 11월23일 1차 목적지였던 홍콩에 닿았다. 그리고 16일후인 12월9일 일가는 한국 땅을 밟았다. 〈金基萬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