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척 없는 선거제 개편 논의에도 느긋한 與野[한상준의 정치 인사이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30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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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전까지 여야 의원 200명으로부터 선거법 개정안에 대한 서명을 받아 정치개혁을 실현하겠다.”(2월 1일, 김진표 국회의장)
“늦더라도 5월 중순까지는 (선거제 개편) 단일안을 만드는 것이 목표.”(4월 14일, 김 의장)
“6월 말 전에 (선거제 개편) 안이 마련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5월 22일, 김 의장)

내년 4·10 총선의 규칙을 정하는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한 김 의장의 발언들이다. 선거제 개편을 마무리 짓는 목표 시점이 4월도, 5월도 넘겨 6월까지 늦춰진 것. 이대로라면 다음 달 중 김 의장이 “7월에는 선거제 개편을 반드시 마무리 짓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원칙대로라면 총선 선거구 획정은 내년 총선 1년 전인 4월에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선거제 개편 논의가 하릴 없이 미뤄지면서 선거구 획정 역시 늦춰지고 있다. 내년 총선이 어떤 제도로 치러질지, 내년 총선의 지역구는 어떻게 정해질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 선거제 논의 지연에도 느긋한 與野
김 의장의 말로 시작했지만, 선거제 개편이 기약 없이 늦춰지는 걸 두고 김 의장을 탓할 순 없다. 김 의장은 선거제 개편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지만, 정작 선거제도를 의결할 국회의원들이 선거제 개편에 미온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김 의장이 이끄는 국회 사무처는 선거제 개편과 관련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월 19년 만의 국회 전원위원회가 출범한 건 김 의장이 여야를 강하게 압박했기 때문이다. 나흘 동안 진행된 전원위에서는 100명의 여야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올라 선거제 개편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밝혔다.
또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지역별, 성별, 연령별 인구 분포를 감안해 500명의 시민참여단을 꾸렸고, 시민참여단은 2주간의 숙의 과정을 거쳤다. 500명이 모여 논의하는 모습은 지상파를 통해 생중계됐다. 선거제 개편에 대한 의원들과 유권자들의 목소리는 모두 나온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의원들의 결정뿐이다. 총선 공천을 앞두고 개별 의원들이 당 지도부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여야 지도부의 담판이 이뤄져야 한다. 선거제 개편은 여야 의원들이 본회의장에서 표결을 해야 법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의힘도, 더불어민주당도 다급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대표끼리 밥 먹자는데 거절했다” “차라리 정책 토론을 하자” 등의 신경전은 오가도 “하루빨리 선거제 개편 논의를 마무리 짓자”는 말은 그 누구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여야는 “정개특위에서 선거제 개편을 논의하자”(국민의힘), “전원위원회 소위원회를 꾸려 선거제 개편 논의를 이어가자”(민주당)는 상반된 주장만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 “선거제 개편 늦어질수록 현역에게 유리”
여야가 선거제 개편에 미온적인 이유에 대해 한 정치권 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선거제 결정이 늦어질수록 현행 제도를 최대한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중대선거구제나 비례대표제 개선 등 큰 폭의 변화는 이뤄지지 못하고 현행 소선거구제의 틀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경우 현역 의원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앞서 정개특위에서 결의한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나 개방명부식 대선구제는 총선 지형을 뒤흔드는 변화다. 1988년에 도입돼 30년 넘게 지속된 소선거구제가 바뀌면 현역 의원들의 생존을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전직 의원은 “결국 여야 현역 의원들의 목표는 선거제 개편을 최대한 늦게 결정해 2020년 총선 제도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선거제 개편이 계속 미뤄지면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민의힘도, 민주당도 다당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위성정당이 다시 출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2020년 총선에서 위성정당을 통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시켰던 여야가 또 한 번 꼼수를 쓸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은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선거용 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미래한국당’을 만들었다. 동아일보DB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은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선거용 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미래한국당’을 만들었다. 동아일보DB
한 전직 의원은 “연말까지도 선거제 개편 논의가 진척을 보이지 못한다면 슬그머니 ‘선거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이번에도 2020년 총선 제도로 치르자’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며 “여야 모두 한 석이라도 더 얻을 수 있다면 위성정당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여야가 하루빨리 선거제 개편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뿐이다. 중대선거구제 등 세부적인 방법에 대해 이견을 좁혀가야 한다면 의원 정수 문제, 위성정당 폐지 등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합의하고 시작하면 된다. 19년 만의 전원위원회 개최와 사상 최초로 도입된 500인의 시민참여단 등에도 불구하고 선거제 개편에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여야 정치권과 유권자 사이의 불신의 벽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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