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보험료 대신 월급 더 달라는데… 지원금 신청 그림의 떡”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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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인상 후폭풍]

소상공인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후속 대책인 ‘일자리 안정자금’을 외면하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5일 서울 종로구 음식문화거리에서 상인들에게 일자리 안정자금 신청을 독려했지만 11일 기준 신청 사업주는 전체 대상자의 0.12%인 1200여 명에 그쳤다. 기획재정부 제공
소상공인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후속 대책인 ‘일자리 안정자금’을 외면하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5일 서울 종로구 음식문화거리에서 상인들에게 일자리 안정자금 신청을 독려했지만 11일 기준 신청 사업주는 전체 대상자의 0.12%인 1200여 명에 그쳤다. 기획재정부 제공
“직원을 뽑으려고 해도 고용보험에 들라고 하면 나가 버립니다. ‘고용보험 가입’이라는 일자리 안정자금 신청 요건을 맞출 수 없는 현실에서 정부 지원이 무슨 소용입니까?”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에서 만난 고깃집 사장 김만석 씨(41)는 이렇게 말했다. 이달 5일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저임금 인상의 여파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김 사장의 고깃집 등 6개 사업장을 방문했다.

당시 김 부총리는 “현장 상인들 대부분이 최저임금 인상의 취지에 공감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본보 취재진이 김 부총리가 찾은 6개 사업장 중 4곳을 다시 찾아 사장들을 직접 만나 보니 4명 중 3명은 “최저임금 인상 추진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 부총리 앞에선 말 못한 현실

정부가 올해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의 핵심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 일자리 안정자금이다. 이 자금을 받으려면 △30인 미만 사업장 △종업원 월 보수 190만 원 미만 △고용보험 가입이라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가운데 ‘고용보험 가입’은 일자리 안정자금 신청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고용보험에 들면 퇴직 때 고용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당장 근로자가 고용보험료를 내야 하는 점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김만석 사장은 “4대 보험에 들자고 하면 대부분 고용보험료로 낼 돈을 월급으로 주는 식당으로 일하러 간다”며 “식당 종사자 상당수가 그런 상태라 일자리 자금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보험 가입 때문에 일자리 자금 신청이 줄어드는 부작용을 줄이려고 올해 근로자들이 부담하는 4대 보험료를 대폭 낮췄다. 월 157만3770원의 최저임금을 받는 근로자는 원래 13만3750원의 보험료를 냈지만 일자리 자금의 지원을 받으면 3만4480원만 내면 된다. 하지만 정부 지원 자체가 한시적인 조치라는 점 때문에 사업주들도 가입을 꺼리고 있다. 홍보도 덜 돼 영세업자들 가운데 신청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빈대떡집을 운영하는 윤모 씨(62)는 “일자리 자금을 신청하러 가 보니 절차가 복잡하고 혜택이 크지 않은 것 같아 그냥 돌아왔다”고 전했다.

설령 정부 지원을 받더라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음식문화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정근회 씨(39)도 사업주에 대한 고용보험료 지원 효과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책의 수혜자들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만큼 일자리 자금 신청 대상자 중 0.12%(1200개)만 신청한 현 상황이 크게 개선되기 어렵다. 정부는 “이달 말부터 일자리 자금 신청이 차츰 늘어날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1월까지 230만 명이 가입할 것이란 당초 예상을 달성하기는 어렵다.

○ 인건비 올라도 음식값은 못 올려


일자리 자금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으면 수혜 대상인 영세 자영업자가 피해를 보게 된다. 실제 최저임금 인상 이후 영세 자영업자들은 인건비가 올라도 가격을 올릴 수 없는 애로를 호소했다.

음식문화거리에서 만난 음식점 업주 A 씨는 “브랜드 없이 식당을 운영하는 영세업자들이 이번 인상의 가장 큰 피해자”라며 “프랜차이즈 식당은 가격을 올려 비용 인상을 고객에게라도 전가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러면 손님이 바로 끊긴다”고 말했다.

실제 KFC, 롯데리아 등 프랜차이즈 햄버거 업체들은 지난해 말부터 제품 가격을 5∼6% 올렸다. 일부 한식 체인점은 연초 15%대까지 값을 올렸다. 고형권 기재부 1차관이 “불법 가격 인상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불공정행위를 엄중 조치할 것”이라며 뒤늦게 ‘물가 잡기’에 나섰지만 오른 가격은 내려가지 않는다.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B 씨는 “공약대로 후년에 정말 최저임금 1만 원이 되면 인건비는 물론 재료 조달 비용까지 크게 오를 것”이라며 큰 체인점과 어떻게 경쟁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은 “이번 최저임금 인상으로 국내 자영업자들이 구조조정 한파를 맞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준비 없는 시행이 문제

전문가들은 초유의 최저임금 인상을 하면서 사전 준비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서비스업 일자리가 이미 9월부터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이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리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음식·숙박업 취업자는 지난해 12월 4만9000명이 줄어 최근 5년 새 가장 많이 감소했다.

이병태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최저임금에 포함되는 임금의 범위를 이제 와서 논의하는 것이야말로 미흡한 준비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최저임금위원회는 최저임금 인상률을 정한 뒤에 추후 어떤 임금을 최저임금으로 볼지 산입 범위를 나중에 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연말인 지난해 12월 26일에서야 정기상여금을 최저임금에 포함시키자는 권고안이 나오며 결국 산입 범위의 조정 없이 인상된 최저임금만 적용됐다.

정부는 내년도 최저임금을 결정하기 전인 올 상반기(1∼6월) 이번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작용을 취합해 제도 개선에 나설 방침이다. 경제부처 당국자는 “정부가 지난해 5월 출범하면서 7월 초 결정한 최저임금 인상률을 지나치게 공약 그대로 추진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 공약대로라면 내년 최저임금은 올해보다 14.9% 오른 8650원, 2020년 최저임금은 15.6% 더 오른 1만 원에 이르게 된다.

세종=박재명 jmpark@donga.com·김준일·최혜령 기자
#최저임금#고용보험료#월급#인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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