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사업 노하우 갖춘 한전 카드로 脫원전 밀어붙이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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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신재생에너지 ‘속도전’]산업부, 관련법 개정 검토 착수

한국전력에 신재생에너지 발전 사업 진출을 허용하기로 한 것은 정부가 2030년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20%를 달성하기 위해 꺼내든 강력한 카드다. 국내 전기사업을 독점하고 있는 우량 공기업을 앞세워 신재생에너지 발전 설비 보급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겠다는 의지다.

정부 뜻대로 지난해 기준 12조 원의 영업이익을 거둔 한전의 자금력이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집중적으로 쓰일 경우 짧은 시간에 고도의 설비·기술 투자가 가능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공약 이행을 위해 효율과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묻지 마 식 투자’를 단행할 경우 자칫 자금 낭비만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최대 공기업인 한전의 재무구조가 악화돼 향후 전기요금 인상 등에 따른 국민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 신재생 20% 달성 위해 법 개정 추진

산업통상자원부는 21일 곽대훈 자유한국당 의원이 ‘한전의 전력 생산 허용 여부’에 대한 입장을 묻자 “신재생에너지 확산을 위해 한전이 제한적으로 발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신재생에너지에 한해 2001년 이후 16년 동안 전기 생산을 금지한 규제를 풀어주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뜻이다. 산업부는 “한전의 발전 사업 허용이 신재생에너지 확산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입장이다.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1999년 공기업 매각 계획을 세워 한전에서 발전 사업을 분리했다. 이후 한전은 전기 생산을 발전자회사 및 일부 민간 발전사에 맡기고 전력 구입, 송전, 배전 업무만 담당하고 있다.

한전이 발전 사업에 뛰어들려면 전기사업법 개정이 필요하다. 산업부는 여야 모두 한전의 발전 사업 진출에 긍정적이라 법 개정이 어렵지 않다고 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 한국당 김규환 의원, 국민의당 손금주 의원 등 여야 의원들은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제출한 상태다.

정부는 무엇보다 한전의 막강한 자금력에 기대를 걸고 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올해 5월 말 한전을 세계 전력부문 기업 2위, 아시아 전력회사 1위로 평가했다. 한전이 발행하는 회사채는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한국 정부가 직접 찍은 국채와 거의 동급으로 취급받는다. 자체 보유 자금과 금융시장 조달 등으로 조 단위 자금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전이 그간 축적한 신재생에너지 관련 기술 및 사업 노하우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한전은 특수목적법인(SPC)을 통해 2GW 규모의 서남해 해상풍력단지에 10조 원을 투자했다. 한전 측은 “미국 괌에서 25년 동안 약 3억4000만 달러 규모의 수익을 올리는 태양광발전, 요르단 풍력발전 등에 진출하며 신재생에너지 사업 모델을 충분히 마련했다”고 밝혔다.

○ 정부의 탈(脫)원전 코드 맞추기 논란

정부는 한전이 신재생에너지 발전에 직접 뛰어들 경우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2030년 신재생에너지 발전량 20% 달성’이 쉽게 현실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 6월 한전의 6개 발전자회사는 신재생에너지 설비 전체 생산량의 68%인 1483GWh를 생산했다. 한전이 발전에 뛰어들면 단기간에 이보다 더 많은 신재생에너지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문제는 투자의 효율성과 전기요금 인상 같은 부작용 우려다. 한화투자증권은 이날 발표한 보고서에서 태양광 발전 설비 설치 비용은 향후 10년간 57%, 해상 풍력은 15%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한전이 신재생에너지 진출에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더 많은 돈을 주고 신재생에너지 발전 설비를 설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기술 개발에 적극 나서 빠른 시일 안에 효율을 높이겠다는 구상이지만 독일 등 선진국이 이미 주도권을 확보한 상황에서 단시간 내에 이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곽대훈 의원은 “신재생에너지 확대에 골몰하다 보니 사업성과 효율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라고 말했다.

한전이 신재생에너지에 많은 투자를 할수록 이를 회수하기 위한 전기요금 인상도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산업부는 “한전은 민간 사업자들과 달리 영업이익률을 최저 수준으로 가져갈 수 있어 전기요금 상승 요인이 크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2008∼2012년 한전은 원자재 가격 인상에 따른 연료비 부담 증가로 9조4000억 원의 영업이익 적자를 나타냈다. 재무구조가 악화되면 언제라도 요금 인상 논란은 불거질 수밖에 없다.

전력산업의 최대 기업이자 공공기관인 한전이 적극적으로 신재생에너지 발전에 참여하는 것은 민간 분야의 사업 기회를 뺏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원자력발전과 화력발전 등에 이어 신재생에너지까지 수많은 하청업체가 거대 단일 공기업에 납품하는 방식으로 산업 생태계가 형성된다면 자칫 글로벌 경쟁력 약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거대 공기업인 한전의 참여는 자생적으로 형성된 신재생에너지 시장을 한순간에 잠식해 2만3000여 개의 민간 회사를 잡아먹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종=이건혁 gun@donga.com / 박성민 기자
#탈원전#한전#문재인 정부#신재생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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