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만나기 꺼림칙”… ‘외부모임 기피증’ 번지는 관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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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法 필요하지만 이대론 안된다]<4>움츠러드는 공무원들

6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한 빌딩 지하 강당. 법무법인 태평양이 개최한 ‘김영란법(부정청탁 금지법) 대응 전략 세미나’에 기업 관계자 350여 명이 참석했다. 태평양이 예상했던 200명을 훌쩍 뛰어넘는 인원이었다. 법률 전문가들의 브리핑이 끝나자 객석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모임에 초청한 공무원에게 식사 대접을 해도 되느냐” 등 구체적인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행사는 2시간을 넘겨서야 끝났다. 태평양 관계자는 “질문이 많았지만 판례가 전혀 없어 명확한 답을 주긴 어려웠다”며 “이런 혼란은 법 시행 후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9월 28일 김영란법 시행 후에는 각종 모임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김영란법의 적용 범위가 워낙 방대한 데다 예외 규정이 모호해 자신도 모르게 법을 어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정부 부처와 공기업, 지방자치단체, 국회 등을 상대로 업무를 하는 기업체 대관 업무 직원들도 “앞으로 접근이 더 어려워질 것 같다”며 막막해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김영란법을 계기로 그동안 고급 음식점이나 술자리, 비공식적 네트워크 모임을 통해 많이 이뤄져온 민관 간 접촉을 투명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정부와 국회는 모호하거나 혼선을 야기할 수 있는 법 대목들을 정비하고, 공직 사회와 관련 업계는 기존 관행에서 과감히 탈피해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에 맞춰가야 한다는 것이다.
○ ‘대외 접촉 기피증’ 앓는 공직 사회

8일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한국자영업자총연대와 전국한우협회 등 소상공인 및 농축산 관련 단체 회원들이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국민권익위원회는 김영란법 시행령안을 
원안대로 확정해 규제개혁위원회에 보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8일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한국자영업자총연대와 전국한우협회 등 소상공인 및 농축산 관련 단체 회원들이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국민권익위원회는 김영란법 시행령안을 원안대로 확정해 규제개혁위원회에 보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가장 위축된 집단은 공무원들이다. 사후 감사에서 문제가 생길 소지를 아예 차단하기 위해 ‘위법 여부가 헷갈리면 아예 참석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고위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기획재정부 공무원 A 씨는 “정책에 대한 피드백을 받거나 업계 동향을 알기 위해 팀 차원이나 개인적으로 업계 관계자를 만날 때가 많다”며 “결국 누군가가 시범 케이스로 처벌을 받는 사례가 나올 때까지는 이런 모임을 줄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 산하 연구원의 B 원장은 “업계 관계자를 만나 의견을 듣는 게 현실 감각을 키우고 연구 주제 선정이나 정책 건의를 할 때도 도움이 된다”며 “가뜩이나 공무원들이 현실을 모른다는 비판이 적지 않은데 자칫 이런 간극이 더 벌어질까 우려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승진, 인사를 앞둔 시기에는 더욱 움츠러들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대민 업무를 담당하는 한 공무원은 “법이 정한 기준을 철저히 지켜도 악의적인 투서나 제보로 인해 구설에 오를 수도 있으니 잔뜩 몸을 사리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교사들 사이에선 각 시도교육청이 정한 ‘공무원 행동강령’과 김영란법 규정이 달라 혼란스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행동강령에 따르면 교육공무원이 학부모, 학부모 단체 등 직무 관련자로부터 금액을 불문하고 일절 금품을 받아선 안 되고, 위반 시 징계를 받는다. 엄밀히 따지면 학부모가 준 빵, 케이크, 음료수를 받는 것도 징계 대상으로 현행 규정이 3만 원 이하 음식물은 문제 삼지 않는 김영란법보다 엄격하다.

서울 지역 공립고 교사 D 씨는 “촌지나 선물을 주는 관행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일부 학부모가 빵, 케이크 등 선물을 주는 경우가 있다”며 “그동안 다 거절하고 돌려보냈는데 앞으로 그 금액이 5만 원이 안 넘으면 문제가 안 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 기업들은 ‘대관 접촉 통로 막힐까’ 걱정

로비가 합법화되지 않은 국내에서 민간기업 대관 업무 담당자들은 국회 및 관공서에 접근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대관 업무라는 것이 결국 민관이 서로의 애로사항을 공유하고 더 나은 대안을 찾는 과정”이라며 “공무원들이 몸을 사리면 식사 약속을 잡기도 힘들어져 당분간 스킨십이 전면 중단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대관 업무 종사자는 김영란법을 두고 ‘소통금지법’ ‘교류차단법’이라고 냉소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외국계 기업들도 대책을 궁리 중이다. 한 글로벌 기업 관계자는 “본사 측 초청으로 여러 나라 언론사나 관련 전문가, 파워블로거 등을 초청해 설명회를 여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앞으로 초청자 경비 부담 행사에 한국은 제외시켜야 하는 건지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한 유럽 자동차업체 국내법인 관계자는 “회사 내부적으로 기념품 같은 선물은 70∼80달러 수준으로 증정하라는 내규가 있다”며 “김영란법은 이보다 빠듯한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에 본사 측과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이런 혼란 속에 주요 로펌들은 때 아닌 시장 창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법무법인 세종 등은 이미 지난해부터 고객사 법무팀에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안내 e메일을 보내는 등 새로운 자문시장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대기업 홍보팀 관계자는 “행사 기념품 가격 가이드라인 등 우리끼리 고민해도 정확한 답이 안 나오는 부분이 많아 로펌에 자문해야 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가 미비한 법 조항을 정비하고, 합리적인 유권해석이 축적되면 이 같은 혼선은 차츰 줄어들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민관 접촉 문화가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예를 들어 기업체 대관 업무 담당자가 공무원이나 정치인을 굳이 식사 자리나 모임에서 만날 게 아니라 사무실에서 공개적으로 만나는 문화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문화 정착을 위해서는 공직자와 정치인 등 민간 부문에서 ‘갑’의 위치에 군림하던 사람들의 의식 전환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지현 jhk85@donga.com·김호경 기자 /대전=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김영란법#태평양#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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