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용관]김종인과 보수의 위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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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정치부장
정용관 정치부장
김종인 카드는 ‘신의 한 수’까진 아니더라도 올 초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문재인에겐 사활이 걸린 승부수였던 건 분명하다. 4·13총선까지는….

문재인은 2012년 대선 전 발간한 포토에세이 ‘문재인이 드립니다’에서 바둑의 가르침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청년 세대를 대상으로 쓴 짧은 에세이에서 그는 “복기(復棋)는 가장 효과적인 바둑 공부”라며 “바둑보다 수백, 수천 배 인생이 중요하다면 바둑보다 수백, 수천 배 열심히 복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아마 3단 실력으로 숱한 승부에 대한 복기를 해봤기 때문이었을까. 문재인이 대선 패배 직후 박근혜 캠프의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낸 김종인을 직접 찾아가 대선 과정을 복기하며 쓰라린 교훈을 되새기곤 했다는 배움의 자세는 인정할 만하다. 특유의 통제하기 힘든 리더십으로 안종범 강석훈 등 경제 참모들과 마찰을 빚다 박근혜 캠프에서 ‘팽’을 당한 김종인의 눈도 이미 그때부터 2017년 대선을 향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뒤 상황은 알려진 대로다. 더불어민주당의 4·13총선 결과가 절묘하게 나왔다. 수도권 압승을 기반으로 원내 1당이 됐지만 호남 3석의 참패와 국민의당의 약진으로 떨떠름한 승리였던 것이다. “호남은 왜 더민주당을 외면했나?”를 놓고 책임 문제가 뒤따르자 친노(친노무현) 진영은 “호남이 지지를 거두면 대선에 불출마하겠다”고 했던 문재인 방어벽 치기에 골몰했다. 문재인으로 향할 책임 추궁의 칼날을 교묘하게 김종인으로 튼 건 예견된 수순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 문재인 측은 수권비전위원장으로 적당히 예우를 갖춰 김종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이미 박근혜 캠프에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하다 팽을 당한 경험이 있는 김종인이 호락호락 넘어갈 리가 없다.

오히려 “당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려던 찰나에 1당을 만들어 줬더니…”라며 배은망덕 논리를 펴는가 하면 “대선후보는 문재인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다른 대선후보군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명하기도 한다. 김종인으로부터 “큰일을 해야지”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전한 한 중진 인사는 “그런 전화를 나한테만 했겠느냐. 김종인을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 이들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과 김종인은 동지 관계라기보다는 동업 관계에 가깝다. 총선이 끝나자 그 동업 관계의 손익계산서가 복잡해졌다. 두 사람의 신뢰는 무너졌으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시각도 많다. 그러나 두 사람의 거래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기업도 대주주라 해서 최고경영자(CEO)를 마음대로 자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김종인은 좋든 싫든 친노 색채를 지우고 경제 담론으로 포장을 해야 하는 문재인에겐 플러스가 되는 보완재다.

김종인의 정치 야심(野心)도 깊이를 알기 힘들다. 느닷없이 호남 연고를 강조하고 나선 그는 2일 전북에선 “전북이 신뢰할 대권주자를 준비해야 한다”며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지금껏 관찰해온 김종인은 누구 못지않게 권력게임에 능한 인물이다. 정체성이 헷갈릴 때가 많지만 분명한 건 어디로 가야 살 수 있는지를 잘 본다는 것이다. 총선 직후 경제 구조조정으로 선수를 치더니 ‘정치 구조조정’이라는 개념까지 들고 나온 건 국민의당 안철수도 허를 찔린 한 수였다. 그런데, 여권엔 그런 ‘선수’가 잘 보이지 않는다. 위기의 보수정권 10년, 새누리당은 야권에 경제성장 담론까지 빼앗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김종인#문재인#4·13총선#더불어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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