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태훈]국민을 위한 여당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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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훈 정치부 차장
황태훈 정치부 차장
무표정한 얼굴에 단발머리의 안톤은 섬뜩하다. 자신의 돈 가방을 훔친 이와 주변 인물을 끝까지 추적해 명줄을 끊는다. 다만 딱 한 명은 살려준다. 휴게소 직원에게 25센트 동전의 앞뒷면을 골라 보라고 한 뒤 “너의 행운”이라며 사라진다. 자신이 원했던 답과 일치한 덕분이다. 코언 형제가 연출한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2007년)’. 물질에 대한 욕망, 사라져 버린 윤리의식이 만들어낸 괴물 이야기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상대방을 쳐내기도 살리기도 하는 정치판도 일반인이 보기에 섬뜩하긴 마찬가지다. 요즘 새누리당의 ‘비박(비박근혜) 컷오프(공천 배제)’도 그렇다. 보복 공천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올해는 정도가 더 심하다. 그 중심에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뜻을 거스른 이들을 정리하는 ‘완장 권력’으로 보였다. 지난달 25일 TK(대구경북) 6명 공천 탈락설에 “대구만 해도 12명인데 어떻게 6명밖에 안 날아가나”라고 농담을 했지만 결국 현실이 됐다.

이한구 공관위는 새누리당 공천의 전략과 비전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계파의 프레임에 갇힌 모습만 부각됐다. 위원장으로서의 언어 품격도 실망스러웠다. 김무성 대표가 공관위의 몇몇 공천 결과에 재의를 요구하자 “웃기는 소리” “바보 같은 소리”라고 무시했다. 대구 지역의 다선 현역 의원을 향해선 “실컷 해먹었지 않았느냐”는 민망한 발언까지 쏟아냈다.

이 위원장은 ‘생존을 위한 선택’을 강요하기도 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3선·대구 동을)의 공천 결과를 계속 유보하며 21일까지도 “스스로 결정하라”고 윽박질렀다. 후보자 등록(24, 25일)이 코앞인데도 아랑곳 않고 있다. 내 손으로 컷오프 하기 전에 공천 포기나 탈당을 선택하라는 식이다. 유 전 원내대표는 지난해 국회법 개정안 파동 당시 박 대통령과 정면충돌하면서 ‘진실하지 않은 사람’으로 눈 밖에 났다. 공관위가 유 전 원내대표의 공천 여부를 차일피일 미루는 게 청와대 눈치를 보는 것 때문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유승민 공천 지연은 부메랑이 됐다. 조윤선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서울 서초갑) 등 청와대 인맥들이 경선에서 대거 탈락했다. 지역구별 사정도 있겠지만 지지층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역풍이 불고 있음이 감지된다.

4선(대구 수성갑) 의원인 이 위원장은 지난해 일찌감치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올해 2월 본보와의 참회록 인터뷰에서 ‘패거리 정치’를 이렇게 비판했다. “박근혜 정부가 잘 안 되면 자기가 손해인데 ‘도움을 줬다, 아니다’로 가르면 인재 운용의 풀을 좁히는 꼴이다. 태어날 때부터 친박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이 위원장은 역설적이게도 박심(朴心·박 대통령의 마음)을 받들어 편 가르기에 앞장서고 있다. 5월 말 국회를 떠난 뒤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최근 “선거 국면에 나라 돌아가는 꼴이 걱정”이라며 책 한 권을 보내왔다. 제목은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그는 “지금 정치인들은 헌신과 자기희생 정신이 부족하다. 말로만 국민을 앞세우면서 계보 계파 이익을 대변한다. 줄서기, 눈치 보기 역시 여전하다”고 꾸짖었다.

여당의 공천 갈등을 보며 새삼 ‘오만’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4·13총선에서 여당이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한다 해도 ‘최악의 19대 국회’가 과연 달라질까. 총선 이후 당권 대권 주도권 다툼만 생각하는 여당에 뭘 기대할 수 있을지 생각할수록 답답한 요즘이다.
황태훈 정치부 차장 beetlez@donga.com
#4·13총선#새누리당 공천 배제#이한구#유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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