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사 명장면]<5>1965년 한일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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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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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한일 불평등 참기 어렵다”… 日외무 불러 ‘청운각 담판’

1951년 시작한 한일회담은 13년 8개월간의 줄다리기 끝에 한일 양국의 정치·외교적 합의로 가까스로 타결에 이르렀다. 1965년
 6월 22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열린 한일협정 조인식. 이동원 외무부 장관(위쪽 사진 왼쪽)과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이 서명을 끝낸
 문서를 교환하고 있다.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학생들이 ‘매국협정을 무효화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아래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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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시작한 한일회담은 13년 8개월간의 줄다리기 끝에 한일 양국의 정치·외교적 합의로 가까스로 타결에 이르렀다. 1965년 6월 22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열린 한일협정 조인식. 이동원 외무부 장관(위쪽 사진 왼쪽)과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이 서명을 끝낸 문서를 교환하고 있다.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학생들이 ‘매국협정을 무효화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아래쪽 사진). 동아일보DB
“이놈아…, 다 필요 없다. 그깟 감투 다 소용없어…. 응? 가지 말아라.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널 보고 이완용이라는….”

“어머니, 전 당당합니다. 매국이 아닌 애국이란 신념이 있기에 떠나는 겁니다. 그리고 하늘에 대해서도 한 점 부끄럼 없습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한일 양국의 국교 수립에 관한 조약)이 전격 체결됐다. 이동원 당시 외무부 장관은 일본 출국길에 만난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이렇게 묘사했다. ‘굴욕외교’ ‘매국협정’이라는 거센 비난 속에서 한일협정을 추진하던 외교관의 비애가 묻어난다.

이 장관과 함께 일했던 문석주 차관 역시 “최선이 못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적어도 차선의 해결책은 마련했다고 믿었다. 하루도 편안한 날 없이 고생해 왔던 외무부 관계자나 대일교섭에 숱한 고생을 했던 대표단으로서는 (국회 비준을 받는 과정에서) 서글픔 또한 금할 도리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과거사 청산이냐, 경제 발전부터인가.’ 한일협정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그러나 외교사적으로 본다면, 한일협정은 무려 13년 8개월간 치열한 ‘외교 전쟁’의 결과물이었다. 1951년 미국이 한일 수교를 종용하면서 회담이 시작됐지만 광복 이후 한일 간의 거리감은 여전히 컸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취임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경제개발자금 확보를 위해 6차 한일회담을 추진하면서 속도가 붙었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은 극비리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 지원’에 합의했고 가장 견해차가 컸던 청구권 문제도 해결됐다. 하지만 ‘김-오히라 메모’라는 이면합의와 독도 폭파 밀약설 등으로 “한일협정은 매국협정”이라는 비판 여론이 거셌다. 1964년 6월 3일 1만여 명이 거리 투쟁에 나서는 ‘6·3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김-오히라 메모 이후 외교 전면전

‘김-오히라 메모’가 끝이 아니었다. 더욱 살벌한 외교전은 이후에 벌어졌다. 국내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국은 2년 반 넘게 끈질긴 외교적 노력을 했다. 경제 개발을 위해서는 대일 청구권 자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박 대통령의 판단이었다.

6·3사태로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1964년 7월 이 장관이 취임했다. 그는 “우리 측은 외무장관급 이상이 일본까지 날아가 테이블에 앉았지만 일본 측은 외무성 아시아국장이 나오는 등 불평등은 시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학생들로서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반드시 일본 외상이 한국에 오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장관은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시위를 부추기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1965년 2월 17일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이 일본 관리로는 광복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시나 외상은 김포공항에 내려 “양국 간 오랜 역사 중에 불행한 시간이 있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 깊이 반성한다”고 해 처음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반발 여론은 상당히 누그러졌다. 이 장관과 시나 외상은 2월 20일 새벽 청운각에서의 ‘한밤 담판’을 통해 가까스로 기본조약의 윤곽을 마련했다.

당시 평행선을 달리던 쟁점인 △1910년 한일병합 조약 무효 △한국의 영토 관할권 조항을 양국이 각각 독자적으로 해석한다는 ‘절묘한’ 표현으로 바꾼 것. 일본의 강제병합은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한국과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이전까지는 유효하다는 일본은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모호한 문구로 타협했다. 한반도 전역의 관할권을 확인하는 규정에 대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유엔 결의를 인용했다. 시나 외상은 회고록에서 “역사는 밤에 이뤄졌다”고, 이 장관 역시 “청운각 회동에서 역사적인 합의가 이뤄졌다”고 각각 술회했다.

한일협정 재조명 받아

“대체 이 서류 몇 개 가져오는 데 몇 년이 걸린 건가….” 한일협정 28개 문서를 받아 든 박 대통령은 흐뭇한 표정으로 서류뭉치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고 한다. “앞으로 150년이든, 1500년이든 잘돼야 할 텐데…”라는 말도 덧붙였다.

2005년 한일협정·한일회담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재평가 작업도 활발해지고 있다. 당시 일본과 국력을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였던 한국이 외교 무대에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는 평가도 나온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전승국(戰勝國) 자격을 얻지 못한 한국은 배상금을 청구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다. 처음 일본이 제시한 대일 청구권 금액은 5000만 달러였다. 당초 ‘김-오히라 메모’는 대일 청구권을 해소하는 대신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약속했고 결국 상업차관을 3억 달러까지 늘려 8억 달러를 받았다. 정식 배상을 받은 필리핀(5억5000만 달러), 베트남(4000만 달러)과 비교해 보면 적지 않은 액수다.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안 되는 국력으로 막강한 관료조직을 가진 강대국 일본과 집요하게 싸워 얻어낸 성과”라며 “이를 통해 개발자금을 확보하고 안보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한일협정#청운각#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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