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기자의 달콤쌉싸래한 정치]가장 쉬운 길을 택한 청와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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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 밀어붙인 공무원연금 개혁안… 합의안 개악으로 여론 들끓자
비판여론 누그러뜨리려 애쓰더니… 판 깨지자 “구체 내용 몰랐다” 발뺌

훈수만 두다 책임 떠넘기는 靑보며 여당이 다시 전쟁터에 뛰어들까

이재명 기자
이재명 기자
한국 정치가 드디어 ‘정신감정’을 받아야 할 상태에 이르렀다. 그 시작은 이랬다. 4·29 재·보궐선거 전날 박근혜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에서 실시된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두 차례 ‘특혜 사면’을 정면 비판했다. 그러자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박 대통령이 (성완종 게이트의) 몸통이고 수혜자”라고 쏘아붙였다. 이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문 대표가) 선거에 패할 것이 두려워 정신을 잃은 것 같다”고 맞불을 놨다. 결국 완패한 문 대표는 당내 갈등으로 혼절 직전이다.

이달 2일 여야는 가까스로 공무원연금 개혁안에 합의했다. 하지만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나온 합의는 아닌 듯싶다. 개혁 상자를 열자 ‘개악’이, 개악 상자를 열자 ‘야합’이, 야합 상자를 열자 ‘책임 회피’가 튀어나왔다. 국민 세금을 아끼자는 게 공무원연금 개혁의 본질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훨씬 많은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국민연금을 더 주겠다고 선심을 썼다.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은 “여야가 정신을 놓았다”며 혀를 찼다.

이 와중에 새정치연합은 한편의 ‘블랙코미디’를 선사했다. 8일 공개회의에서 정청래 최고위원이 주승용 최고위원에게 “공갈치지 말라”며 막말을 퍼붓자 주 최고위원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유승희 최고위원은 당의 막장 행보에 축하공연을 하듯 노래 ‘봄날은 간다’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이게 무슨 ‘납량특집’이란 말인가.

이제 국민이 기댈 곳은 청와대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실낱같은 기대마저 무너지고 있다. 여야의 공무원연금 개혁안 합의가 개악으로 판명나자 여론은 들끓었다. 애초 청와대는 비판 여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기대에 못 미친 개혁이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었다. 이 판이 깨지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었다. 더욱이 공무원연금 개혁은 여야의 어젠다도 아니었다. 박 대통령에게 떠밀려 여당이 총대를 멨다. 그러니 청와대가 ‘감 놔라, 배 놔라’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6일 판이 깨지자 청와대는 부리나케 발을 뺐다. 여야 대표가 서명하기 전까지 합의안의 구체적 내용을 몰랐다는 것이다. 합의안이 나온 지 나흘이나 지나서다. 합의안이 나왔을 때 곧바로 판을 엎었다면 청와대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판이 깨지면서 청와대 책임론이 불거지자 부모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마냥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건 개혁 실패가 아니라 대통령의 꾸지람이었는지 모르겠다.

영화 ‘위 워 솔저스’에서 무어 중령은 베트남 전장에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감히 여러분 모두를 무사히 귀환시키겠다고 약속할 수 없다. 그러나 신 앞에 맹세한다. 적진에 뛰어들 때 내가 제일 먼저 첫발을 들여놓을 것이며, 적진을 빠져나올 때 가장 늦게 발을 뺄 것이다. 제군 중 어느 누구도 내 뒤에 남겨놓고 철수하지 않겠다.”

사달이 나자 제일 먼저 발을 뺀 청와대를 보면서 과연 여당이 다시 전쟁터에 뛰어들까. 청와대가 진정 공무원연금 개혁을 성사시키려 했다면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렸어야 했다. 그래야 여야가 다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그게 전략이고, 국정 운영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금언의 원저작자인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로 ‘조언하는 것’을 꼽았다. 청와대의 ‘훈수정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청와대는 연일 “공무원연금 개혁은 국민과의 약속이다,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은 분리 처리해야 한다, 민생 법안은 하루빨리 통과시켜야 한다…”고 외쳐댄다. 참 쉽다.

공무원연금 개혁 실패의 가장 큰 대가는 늘어나는 재정 부담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아무것도 개혁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정치 불신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직후, 새누리당 이정현 최고위원(당시 대통령정무수석)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최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책을 보고 있다. 한때 영국에서 어린아이들이 ‘남자도 총리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대처가 11년이나 총리를 하니 나온 말이다. 한국에서도 아이들이 ‘남자도 여자만큼 대통령을 잘할 수 있느냐’고 물을 날이 올 것이다.”

이 최고위원의 기대가 속절없이 떨어진 벚꽃마냥 처량하게 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 봄날은 이렇게 가는가.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공무원연금#개악#국민연금#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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