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南 자주성 없다” 비위 건드리며 시작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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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후폭풍]회의록에 나타난 김정일 협상 스타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이 공개됨에 따라 노무현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회담 스타일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김 위원장은 남북경협특구 확대 등 한국 측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총리회담 등에서 논의하자”며 딴청을 피우면서도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평화협정 등 북측의 핵심 이해가 걸린 이슈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은둔의 독재자’ 김 위원장은 국민의 손으로 뽑힌 남한 대통령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 김정일은 밀당(밀고 당기기)의 달인?

김 위원장은 상대의 비위를 건드리며 회담 분위기를 시작부터 주도했다.

“지금 상급(장관급)회담도 제대로 되지 않고 정세에 따라 했다 말았다 한다. 남쪽 사람들이 자주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자주성이 없다고 하면 인격 모욕하는 것 같은데 좀 눈치 보는 데가 많지 않은가.”

정상회담 합의문에 대해서도 “(1972년) 7·4공동선언 때 기대를 걸었는데 정권 교체와 정세변화로 빈 종이짝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이번에 합의본 문제를 다시 문서화하면 또 빈 종이짝이 되지 않겠나”고 비꼬았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김정일은 후계자 시절부터 30년 넘게 한국 대통령들의 성향을 파악해 왔을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의 승부사 기질을 미리 알고 자극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노 전 대통령이 여러 남북경협방안을 제안했지만 김 위원장은 그때마다 “총리급, 경제장관회담에서 다루면 되지요”라며 답변을 피해갔다. 또 “우리가 군대 칼은 쥐고 있지, 경제 돈은 못 가지고 있다”며 마치 자신의 권한이 아닌 듯 설명하기도 했다. 전영선 건국대 교수는 “김정일 자신이 답하기에는 의제의 수준이 낮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북한의 핵심 관심사안인 북-미 관계개선과 평화협정 체결에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자세로 큰 관심을 보였다. 김 위원장은 “부시 대통령이 노 대통령에게 종전선언 문제를 언급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아주 의미가 있다. 평화문제를 논의할 기초가 마련될 수 있다”며 노 전 대통령의 노력을 주문하듯 발언했다. 개성공단이 1단계 시험단지에서 분양을 멈춘 것에 대해서도 “남측이 의지가 있었으면 더 빨리 나가는데, 남쪽 사람들에게 (괜히) 땅만 빌려준 거 아니냐고 인민들은 생각한다”고 압박했다. 그는 “군대가 우선 반대할 테고 경제 행위꾼들도 ‘아직 개성에서 맛도 못 본 주제에 뭣 때문에 해주를 또 내라고 (하나)’. 아마 안 할 겁니다”라며 단호히 배격했다. 마치 민주국가의 대통령이 ‘국내 여론 때문에 쉽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며 노 전 대통령을 농락한 셈이라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 선심 쓰듯, 내 잘못을 공동책임인 듯 말 포장

노 전 대통령이 추가 단독회담을 요구했을 때는 “내 회의도 저녁시간으로 다 돌려라. 노 대통령님의 끈질긴 제의에 내가 양보해서…”라며 선심 쓰듯 말했다. 이튿날 일정을 잡을 때도 “내일 국방위 일정이, 과업들 때문에 시간이 얼마 없는데 대통령께서 오셨기 때문에…”라며 양보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는 정상회담의 핵심 쟁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석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정상회담 결과 발표 형식에 대해 ‘아직 합의를 못했다’며 제지했지만 “6·15 때처럼 선언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중국 베이징(北京)올림픽 남북공동 응원단 파견안을 건의하자 “의미는 무슨, 인기나 끌어서 뭐하게…”라며 면박을 주면서도 “그것도 정상이 합의했다 하지요, 뭐”라며 즉흥적으로 수용했다. 남북정상회담 정례화와 관련해서는 “수시로 협의한다(고 씁시다). 정례화라고 하면 우리 사람 다 이해 안 됩니다”라며 단어 하나까지 따졌다.

NLL을 서해상에서 지워버리겠다는 속내는 능수능란한 화술로 포장했다. 김 위원장은 “바다에 종잇장 그려놓은 지도와 같이 북방한계선은 뭐고, 군사경계선은 뭐고, 침범했다 침범하지 않았다, 그저 물 위의 무슨 흔적이 남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어 “전번에 서해사건 때도 실제로 흔적 남은 게 뭐야, 흔적 남은 게 뭐 있는가”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저 생억지, 앙탈질하는 게 체질화되다 보니까 50년 동안 자기 주의, 주장만 강조하고…”라고 비판했다.

1, 2차 연평해전 등을 북한이 일으켜놓고 마치 남북 모두에 그 책임이 있는 양 오도하는 특유의 말속임이다.

조숭호 기자·윤상호 군사전문기자 sh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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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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