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前대통령 “내가 싸움꾼? 난 언제나 약자편… 강자 불의에 맞섰을 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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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盧 前대통령 4주기… 11년전 미공개 인터뷰로 본 ‘민주 경선주자 노무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미공개 인터뷰에서 “내가 자꾸 싸우는 것으로 비치는데 힘 약한 사람과는 싸우지 않았다. 불의한 권력과 싸웠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열변을 토하는 모습. 동아일보DB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미공개 인터뷰에서 “내가 자꾸 싸우는 것으로 비치는데 힘 약한 사람과는 싸우지 않았다. 불의한 권력과 싸웠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열변을 토하는 모습. 동아일보DB
《 검사는 수사로, 판사는 판결로 말하듯 신문기자는 기사로 말한다. 기사로 말하기 위해 기자는 늘 취재한다. 그러나 취재한 모든 것이 신문 지면에 실리지는 않는다. 새로운 뉴스는 분초(分秒)를 다투며 발생하고, 신문 공간은 제한돼 있다. 지면에 실리지 못한 취재는 그 기자의 취재수첩이나 노트북PC에서 언제 깰지 모를 깊은 잠을 자게 된다. 그것은 기자의 분신 같다. 그 취재원과의 인연이자 추억이다. 22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4주기(23일)를 하루 앞두고 기자는 11년 동안 기자의 노트북에 잠겨 있던 그와의 단독 인터뷰를 다시 열었다. 인터뷰는 2002년 1월 18일 당시 서울 여의도 금강빌딩 3층 노무현 민주당 상임고문의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유일한 배석자는 유종필 언론특보(현 관악구청장)였다. 노 전 대통령은 민주당 경선주자(7명) 중 1명이었다. 그때는 ‘이인제 대세론’이 강했다. 그래서 이 인터뷰에는 ‘계란으로 바위 치려는’ 노무현의 간절한 초심이 묻어 있다(인터뷰는 당시 ‘민주당 경선주자 7인 집중 탐구’(가제)라는 기획 취재 차원에서 이뤄졌으나 기획이 통째로 수정되면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

―노 고문께서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부산에서 여러 차례 출마했습니다. 그런데 1996년 15대 총선 때는 왜 서울 종로를 선택했습니까?

“당시 종로는 서로 안 나가려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꼭 나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안 하려는 자리라면 내가 한번 해보자. 영호남 지역당을 혼을 내주겠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덤볐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총선에서 이른바 ‘꼬마 야당’이던 통합민주당 후보로 나서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후보 등과 겨뤘으나 3등(득표율 17.7%)에 그쳤다.

기자는 총선 당시 사회부 수습기자로서 노 전 대통령을 처음 취재했다. 그는 총선 패배 후 자신을 담당했던 기자들과 식사를 하면서 유권자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다.

―그때 “유권자들이 어떻게 나를 안 찍을 수 있느냐”는 한탄을 했는데요.

“낙선의 실망에서 비롯된 심정이었다고 이해해 주세요. 선거 때마다 유권자의 이중성, 여론의 이중성에 대해 뼈저리게 실망하곤 합니다. 저는 유권자들의 일반적 요구에 충실히 따랐다고 생각합니다. 유권자들은 지역주의를 개탄하면서도 결국 지역주의로 표를 찍어 버리지 않습니까. 때때로 개탄하고 실망하면서, 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도전합니다.”

―에세이집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YS)에 대해 ‘아랫사람을 다루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호평을 했습니다. YS에게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직관과 결단입니다. 한번 결단하면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그런 자세 말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부산에 계속 내려가서 승부수를 던지는 것도 저의 타고난 성격도 있지만 YS가 던져 온 (정치적) 승부수에서 배운 측면이 많습니다. 승부수가 운명을 가릅니다.”

―노 고문을 취재하면서 느낀 점이 ‘말씀과 논리가 지나칠 정도로 단순 명쾌하다’는 것입니다.

“대세에 어울려 있는 사람은 자기를 명쾌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외자의 길을 가는 (나 같은) 사람은 설명을 해야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습니까.

“막연하나마 한번도 찬성해 본 적이 없고 지지해 본 적 없습니다. 오히려 요즘 와서야 ‘그 시기 독재자는 경제를 다 말아먹었지만, 박정희만 말아먹지 않았고 그의 사금고에 부정축재가 있었다는 보도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박정희 시대가 친일 지주 세력을 사회 주류로서는 어느 정도 종언을 고하게 하고, 군인과 관료 엘리트 시대를 만들어 놓은 점, 그가 젊은 장관을 발탁하고 사회 기류를 바꿔 놓은 것 등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찬성하지 않고. 경제를 살려 놓은 것도 그분 혼자만의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은 어떤 원칙으로, 어떻게 교육했는지 궁금합니다.

“아주 평범합니다. 정말 평범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는 과외시키지 말자’고 했다가 부부싸움도 했습니다. 대체로 중학교 때까지는 아이들을 풀어 놓았습니다. 방임주의적 교육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 아이가 아파트 단지에서 인사 잘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것 보면서 ‘초보적 예의는 잘 가르친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신발 가지런히 정리하고. 목욕탕 가서 비누칠할 때 샤워기 틀어 놓지 말고, 반드시 횡단보도로 건너라. 그런 것이 교육의 핵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두 아이 다 대학생이 됐지만 아직도 (자녀 교육 문제는) 우왕좌왕합니다.”

―끝으로 ‘노무현은 어떤 사람이다’라고 한마디로 정의해 주십시오.

“저는 우리 사회의 특권과 부조리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서민들 속에서 드물게 성공한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저는 대중적 정서와 지지만 가지고 있습니다. 특권적 문화를 해소하고, 뭔가 합리적 법이 통하는 사회, 보통 사람의 사리가 통하는 사회에 대해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자꾸 싸우는 것으로 비치는데, 힘 약한 사람과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권력과 싸웠을 뿐입니다. 항상 약자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강자의 불의에 대해 항상 문제를 제기하고 개혁하려고 맞서 왔습니다.”

노무현 민주당 상임고문이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뒤부터 기자는 그와 이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도 언젠가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더 이상 강한 상대가 없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는 누구를 상대로 어떤 승부를 하셨습니까. 그 결과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승부 말고 다른 방법은 혹시 없던가요.’

기자가 지금의 대통령에게도, 앞으로 대통령이 될 분들에게도 계속 묻고 싶은 질문이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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