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비극의 축소판’ 박인숙 씨의 굴곡진 삶]<下>“남조선이 좋더냐” 뜨거운 국물을 얼굴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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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찾아 南으로 … 아들 구하려 北으로…

탈북 직전인 2005년경의 박인숙 씨.
탈북 직전인 2005년경의 박인숙 씨.
《 북한 체제에서 ‘월남자의 딸’이라는 숙명에 체념하고 살아온 박인숙 씨(67). 자신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대학을 아들이 나오고 손녀까지 안겨주자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남쪽의 아버지와 미국에 거주하는 친오빠의 경제적 도움으로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탈북을 결심한 것. 6·25전쟁으로 아버지와 생이별한 지 55년 만이었다. 그는 부녀를 가른 사선과도 같은 분단의 장벽을 스스로의 힘으로 넘었다. 하지만 이는 아들과 새로운 이산의 시작이기도 했다. 탈북 이후 남쪽으로 향하는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중국에서 체포된 그는 북송된 뒤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온간 비인간적 학대와 고문을 받았다. 그것은 박 씨만의 경험이 아닌 수십만 탈북자들이 겪었던 끔찍한 과거이자 현재다.》
탈북 과정과 북송 이후에 겪은 일이 상세하게 기록된 박 씨의 수기는 수많은 탈북자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박 씨는 탈북(脫北)과 북송(北送), 그리고 고문을 받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가 쓴 수기엔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던 고통의 순간들이 매우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 탈북 결심하고 찾은 아버지 집엔…


“탈북! 이것을 생각하려면 그보다 먼저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이고,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 생명이지만 가족을 위해 서슴없이 내던질 줄 알아야 생명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죽음! 이제 안 오면 다음에 올 것이고 다음에 안 오면 그 후에 올 것이다. 세상에 죽지 않고 계속 사는 생명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거의 3개월간 이런 전쟁을 머릿속에서 벌였다.”

“탈북을 결심하고 아버지가 계시던 (함경북도) 어대진의 2층 집을 방문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차에서 내려 큰 길로 1시간 30분 정도 내려가자 길 왼쪽에 산자(나무 기둥에 진흙을 바른 뒤 시멘트로 얇게 미장하는 방식)로 지은 2층집이 나타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고 우리들의 유년기가 흘러간 집!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웬 할아버지 지나가신다. ‘뉘기요? 어째(왜) 우오?’ 나무랄 데 없이 착하게 살아온 어진 후손으로서 누구라고 떳떳이 말 못하는 처지에 있으니 이 얼마나 긴긴 세월을 뛰어넘는 형벌이란 말인가. ‘우리 아버지 박○○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 족쇄에 묶여서 가는 북송길


“5월 15일 (중국) 투먼(圖們) 변방대에 압송됐다. 이날은 45년 전 할아버지가 잡혀간 날이다. 북송돼 관리소(정치범수용소)행이 결정된 사람들은 모두 다 정신환(병)자와 흡사했다. 아침에 30명을 호명했다. 두 명씩 족쇄로 묶어 차에 태웠다. 나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겉으로는 무한한 자유로 가장된 이 도시에도 지금 이 순간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숨어 지내야 하는 탈북자들의 고통이 있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젊은 여자들이 창밖을 보며 울고 있다. 무슨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기에 태어난 땅을 등지고 남의 나라에 와서 수모를 겪다가 이 모양이 됐는가. 아버지를 만나는 날까지만이라도 살고 싶었다. 다리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유유히 흘러가는 두만강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자유가 너무 부러웠다.”

○ 비명이 끊이지 않는 수용소

박인숙 씨의 수기 중 일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고문과 학대 모습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박인숙 씨의 수기 중 일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고문과 학대 모습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국가안전보위부원들의 서릿발 같은 눈길(눈총)을 받으며 우리는 머리도 들지 못한 채 땅바닥에 두 줄로 앉았다. ‘보위부에 대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죄를 토설(실토)하지 않고서는 결코 살아서 나가지 못하는 곳이다. 나라를 배반한 죄를 반성하고 뉘우치는 자에게는 당의 은덕이 베풀어질 것이지만 만약 거짓으로 일관하면 즉결 처단할 것이다. ○년들, 남조선이 그렇게 좋더냐. 조국을 배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새벽 6시 숱한 사람을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와 같이 왔던 여자들이 모두 없어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들은 중국에서 한국행을 자인한 사람들이라 회령 22호 관리소로 즉각 이송됐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고개 숙여 애도를 표시했다.”

“찌는 듯한 여름 날. 6평(약 19.83m²) 면적에 20명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야 하는 자세로 배고픔을 참으면서 앉아 있었다. 어제 몸 검사할 때 맞은 여자는 머리가 아프다고 울었다. 구류장 한켠(한쪽) 변소에서 나는 냄새가 지독했다. 음식을 마구 먹었다. 강냉이를 쪼개 삶은 죽이었는데 시고 썩은 내가 났다. 5분 내에 변기 물에 그릇을 씻어 내보내야 했다.”

“한국(행) 기도를 자백하지 않으니 악에 바친 예심원이 귀쌈(따귀)을 갈겨 멍해졌다. 팔을 비틀어 어깨 인대가 늘어났는지 쑤시고 아팠다. 2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아프다. 검토가 40일간 계속됐다. 마침내 보위부에서 풀려났다.”

“한 달 있다가 옮겨진 곳이 ○○안전부였다. 감방이 10개였는데 우리 감방의 10명 중 탈북자가 6명이었다. 나머지 4명 중 1명은 먹을 것이 없어서 시어머니를 칼로 위협한 며느리였다. 2명은 한국 드라마를 보다 잡혀 온 어느 공장의 보위대(무장경비대) 처녀들이고, 1명은 중국에 있는 딸로부터 돈을 받은 여성이었다. 말하다가 들키면 쇠창살 앞에 세워두고 창살 위에 손을 펴서 얹게 한 뒤 막대기로 내리친다. 비명을 지르면 반복한다.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 머리칼을 쥐고 마구 흔들기도 한다. ‘또다시 반역을 저지르겠는가.’ ‘안 그러겠습니다.’ 추워서 잠도 안 오지만 이와 벼룩 또한 고문이었다. 줄지어 앉아 노동당 10대 원칙을 외워야 한다. 그 다음엔 이를 잡아야 한다. 20분이다. 유일한 자유시간이 이때다.”

“어제 들어온 여자가 실수를 했다. 밥그릇을 제꺽(재빨리) 내보내지 못했다고 뜨거운 국물을 면상에 들이부었다. 툭툭 턴다는 이유로 몽땅 세워놓더니 밥도 주지 않고 가버렸다. 소금물인 국을 부어 놓으면 강냉이 껍질과 속이 둥둥 뜨고 돌이 버적버적 씹히는 밥은 시큼털털한 소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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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박인숙#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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