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 전 ‘민주공화당’ 정할땐 회의 7번-투표 4번 거쳤다

  • Array
  • 입력 2012년 2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1963년 민주공화당 신당발기인대회 회의록 원본. 당시 서기를 맡았던 동훈 전 국토
통일원 차관이 8일 동아일보에 제공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963년 민주공화당 신당발기인대회 회의록 원본. 당시 서기를 맡았던 동훈 전 국토 통일원 차관이 8일 동아일보에 제공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963년 1월 17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광화문 인근 삼양빌딩의 한 사무실. 5·16군사정변 참가자들을 주축으로 한 신당 발기인 71명이 모인 가운데 신당의 당명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도 발기인 대표로 참석했다. 이미 6번의 회의와 3번의 투표를 거쳤고, 결정 시일도 2차례나 연기된 상태였다. 신당 발기인 11명이 각자 자신이 제시한 당명 제안 설명을 한 뒤 11개의 당명을 놓고 최종 투표가 진행됐다. 민주공화당 49표, 공화당 12표, 정화당 민화당 새공화당 각 2표, 민생당 새공화당 협동당 각 1표 등으로 민주공화당이 신당의 당명으로 확정됐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1980년 10월 해산될 때까지 17년 동안 유지돼 우리나라 정당사에서 최장기 당명 기록을 가진 민주공화당은 이렇게 탄생했다.

동아일보는 8일 당시 신당 발기인회 회의 때 서기를 맡았던 동훈 전 국토통일원 차관으로부터 회의록 원본을 입수했다. 새누리당 당명 개정 과정에 그동안 언론에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이 회의록은 종이가 많이 삭아 만지면 문드러질 정도였다. 하지만 당명을 두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심사숙고했던 발기인들의 고심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약 50년이 지난 요즘 새누리당의 당명 개정 과정에서 당원이나 의원들의 의견 수렴이나 투표 참여가 없어 논란이 일고 있다. 당시 상황을 보더라도 이번 당명 개정 과정에 아쉬움이 남는다는 게 동 전 차관의 지적이다.

회의록에 따르면 당명이 결정되기 5일 전인 그해 1월 12일 3차 회의에서 실무진은 ‘민주공화당’과 ‘민주헌정당’ 2개의 안을 제시했다. 전날 열린 2차 회의 때 김종필 발기인 대표는 발기인들에게 “자신이 구상한 당명을 제시하고 프리토킹 형식으로 의견을 교환하자”고 제의해 놓은 상태였다. 발기인들은 각각 ‘재건민주당’ ‘자유민주당’ ‘민주통일당’ 등 다양한 당명을 제시했다. 외국의 사례를 조사하고 한자 사용 문제 등을 고려해 추후 논의하자는 얘기가 오갔다.

13일 4차 회의 때는 14개의 당명을 두고 1차 투표가 진행됐고, 그중 상위 5개의 당명을 놓고 2차 투표가 진행됐다. 투표 결과 국민당과 민주공화당이 19표로 동수가 나오자 이 두 개의 당명을 놓고 3차 투표가 진행됐다. 국민당 23표, 민주공화당 21표로 국민당이 1위였다. 신당의 당명이 국민당으로 정해질 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영문 번역을 놓고 이의가 제기됐다. 회의록에는 “한 발기인이 ‘Nationalist Party’로 하자고 처음 제의했으며 오해를 없애기 위해 ‘Nation's Party’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적혀 있다. 동 전 차관은 “회의록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권이 당시 후진국 사이에서 유행하던 민족주의나 좌파 성향의 국가가 아니냐는 미국의 우려를 감안해 ‘국민당’을 후보군에서 제외했다”고 회상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