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상임고문 별세… 군사정권의 모진 고문 이겨내고 ‘원칙정치’ 온몸으로 실천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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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는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2011년 10월 18일)

블로그에 띄운 이 글을 마지막으로 다시 책상 앞에 앉지 못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린 민주통합당 김근태 상임고문. 마지막까지 세상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지만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는 1965년 대학 입학 이후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졌다. 1967년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때 총·대선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제적당해 강제 징집됐다. 1970년 복학했지만 이듬해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지명 수배됐다. 이후 1979년 10·26사태 때까지 도피생활을 하면서 ‘공소외(外) 김근태’라는 별명이 붙었다. 판검사들이 법정에서 체포하지 못한 그를 부를 때 ‘공소외 김근태’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김 상임고문은 2007년 12월 파킨슨병 판정을 받고 약물치료를 해왔다. 증상이 악화돼 2011년 11월 29일 병원에 입원한 그는 끔찍하게 사랑한 딸 병민 씨(30)의 결혼식(지난해 12월 10일)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파킨슨병은 고문의 후유증일 것이란 얘기가 많다. 1985년 9월 4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이던 38세의 김근태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영장도 없었다. 9월 25일까지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 등에게 8차례의 전기고문과 2차례의 물고문을 받았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호소했지만 고문자들은 “그건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완전한 항복을 요구했다. 결국 ‘경남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월북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과 자주 만났다’는 황당한 소설을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지옥 같은 22일 동안 그는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고, 조서에 날인할 때 얼른 ‘사법경찰관 ○○○’라고 쓰인 이름을 머리에 새겼다. 전기고문으로 발뒤꿈치가 짓이겨져 야구공만 한 딱지가 생기자 이 딱지를 휴지에 싸서 보관해뒀다가 변호인(이돈명 변호사)에게 전달해 비인간적 고문의 실상을 낱낱이 세상에 폭로했다.

‘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패혈증으로 타개한 2011년 12월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서 원혜영 공동대표(가운데 앉은 사람) 등 당직자들이 조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패혈증으로 타개한 2011년 12월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서 원혜영 공동대표(가운데 앉은 사람) 등 당직자들이 조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제도권 정치에 발을 디뎠다. 당시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 상임고문의 사면복권을 요청해 받아들여진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서울 도봉갑에서 내리 3선을 했다. 원칙론을 강조하면서도 온화한 성품으로 신사다운 국회의원을 선정하는 백봉신사상에 7년 연속 뽑혔고 그중 4번은 대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재야의 리더’라는 무게에 걸맞은 당직을 맡지는 못했다. 현실 정치에서는 동교동계 등 구여권 주류세력에 밀렸다. 2002년 3월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정치 관행을 바꿔야 한다”며 불법정치자금 수수에 대한 양심고백을 한 후 경선 레이스에서 물러났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2004년 총선에서 재야 및 386 운동권 출신이 대거 원내에 진입하면서 고인은 열린우리당의 정통개혁그룹 수장으로 입지를 회복했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했지만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2004년 6월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총선공약이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묵살하려 하자 “공약은 지켜져야 한다.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고 요구했다. ‘원칙주의자 김근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정치권의 일대 ‘사건’이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열린우리당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독배를 들겠다”며 당 의장을 맡았지만 갈수록 노무현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은 심해졌다. 2007년 열린우리당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 경선 때 범여권 대통합을 위해 불출마를 선언하며 또다시 기득권을 버렸다. 2008년 총선에 나섰지만 뉴라이트 계열의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에게 패했다.

고문 후유증은 그의 정치활동에 상당한 지장을 불러왔다. 정연한 논리와 신뢰감, 올바른 문제의식을 두루 갖추고도 대중 호소력이 약하다는 평을 들어야 했던 것은 고문 후유증에 따른 장애 탓이었다. 손을 떨고 몸과 고개를 자연스럽게 돌리지 못해 몸과 고개를 함께 돌리는 움직임이 어색하게 비쳤다. 매년 고문을 받은 시기인 초가을만 되면 한 달가량 몸살을 앓았다. 말도 어눌해지고 몸동작도 둔해졌다. 연설을 할 때 고음으로 올라가면 콧소리 때문에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준비하던 2001년 7월 코수술을 받았다. 수술대에 누운 그는 의사가 마취를 할 때 눈물을 흘렸다. 그는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고문 트라우마로 인해 의자에 반쯤 누운 채로 얼굴을 가리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치과 진료도 받지 못했다.

측근들은 “평생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아름다운 정치인”이라고 회고했다. 임종을 한 측근인 이인영 전 의원은 “아름다운 별이 졌다. 민주주의 역사의 성장에 그의 이름을 새기겠다”고 말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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