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前중앙정보부장 별세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2일 03시 00분


7·4 공동성명-DJ 납치 등 주도
나는 새도 떨어뜨린 ‘유신 실세’

박정희 정권, 특히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권력자였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지난달 3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1924년 울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5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해 이듬해 3월 임관한 뒤 1948년 육군 정보국 차장을 맡았다. 그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공보실장을 맡으면서부터. 1963년 박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1972년 5월 김일성과 첫 남북 비밀회담을 하고 7·4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그는 김일성을 만나러 갈 때 청산가리를 품고 갔다고 증언한 바 있다. 최근 발굴된 북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그는 그해 10월 유신헌법을 발표하기 전에 북측에 두 차례에 걸쳐 선포 계획을 알리기도 했다.

▶본보 9월 24일자 A1면 참조
“10월유신 선포, 北에 2차례 미리 알렸다”

그러나 그는 유신체제를 확립하고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하는 등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의 권력을 누리던 그는 1973년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권부에서 사라지게 된다.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은 술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그를 따르는 ‘하나회’ 후배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구속됐다. 윤필용과 가깝던 고위 장성들이 대거 구속되는 과정에 초조해하던 그가 ‘김대중 납치사건’을 벌였다가 해임됐다는 얘기도 있다.

고인은 1978년 10대 총선을 통해 재기했지만 10·26사건으로 박 대통령이 암살되고 신군부가 5공화국을 출범시킨 뒤 정계를 떠났다. 신군부로부터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힌 그는 정계를 떠나며 “정치자금에 관여했다고 해서… 솔직히 말씀드려서 딴 사람보다 좀 잘살았다”고 말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그는 2004년 부인이 당뇨 등 지병으로 별세한 뒤 노인성 질환을 앓는 등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그가 소유했던 경기 하남시 자택과 땅은 보험회사 대출금을 갚지 못해 1999년 8월 경매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서울 강동구 상일동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에 차려진 빈소(02-440-8922)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운찬 국무총리,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등이 조화를 보냈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 김무성 김기현 이혜훈 한나라당 의원,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한광옥 민주당 상임고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이 빈소를 찾았다. 한 고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용서와 화해를 강조한 만큼 그 뜻에 따라 다 용서해줄 때가 됐다”고 말했다. 발인은 2일 오전 8시 30분,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