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유신 선포, 北에 2차례 미리 알렸다”

  • 입력 2009년 9월 24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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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1971~72년 北외교문서 입수

박정희 정부가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계엄 선포와 헌법 폐지, 국회 해산, 대통령 간선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유신(維新) 체제’를 선포하기 전에 두 차례 북한 당국에 이를 예고하고 배경을 설명한 것으로 23일 확인됐다. 남측은 10월유신 선포 다음 날인 18일에도 북측과 다시 접촉해 “남북대화의 목적에 부응하는 체제를 만들 것”이라고 헌법 개정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북한은 같은 해 7월 4일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등 3원칙에 따라 남북통일을 이룬다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동유럽 사회주의 우방국들에 “한반도에서 미국과 일본을 몰아내 박정희 정권을 고립시키고 내부 혁명역량을 강화해 남북연방제 통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국의 국제 냉전사를 연구하는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가 동독과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옛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관하고 있던 당시 북한 관련 외교문서를 입수해 분석함으로써 밝혀졌다. 우드로윌슨센터는 2006년부터 한국의 북한대학원대와 함께 ‘북한 국제문서 조사사업(NKIDP·North Korea International Documentation Project)’을 진행해 왔으며 1971∼72년 당시의 북한 관련 문서 39건(총 164쪽)을 영어로 번역했다.

동아일보가 단독으로 입수한 문서들에 따르면 김재봉 당시 북한 외교부 부부장은 1972년 10월 19일 동유럽 6개국 외교관들을 만나 “16일 판문점 남북 접촉에서 남측은 박정희 대통령이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고, 17일 (10월유신) 발표 1시간 전에도 남측이 전화를 걸어 라디오를 주의 깊게 들으라고 알려왔다”고 전했다.

이 문서들에 따르면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위원장(김일성의 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부장은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어 (통일을 위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 측에는 발표 하루 전에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발표할 성명 사본을 미리 전달했다. 나머지 주한 외교사절에게는 발표 3시간 전에 알렸다. 당시 남한 언론엔 유신 선포 사실이 사전에 보도되지 않았다.

한편 김일성 내각 수상은 1972년 9월 22일 정준택 부수상을 루마니아에 보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에게 대남 평화공세(peace offensive)의 목적과 배경을 설명했다. 정 부수상은 “남한과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남한 내부의 혁명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길을 고민한 끝에 ‘평화공세’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당시 대남 평화공세에 대한 북한의 의도가 드러난 것은 북한이 표면적으로는 대화를 주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한반도의 적화를 노렸다는 보수진영의 시각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선준영 북한대학원대 석좌교수(전 유엔대사)는 “이들 문건은 최근 북한의 대외 유화 공세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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