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석에 끌려다닌 172석

  • 입력 2009년 1월 3일 02시 57분


직권상정 ‘헛물’… 민주당 전략 못읽고… 洪원내대표 너무 믿어

한나라당은 4월 총선 후 무소속 의원 등을 흡수하며 172석의 거대 여당이 됐지만 82석의 민주당에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니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해 5월 30일 18대 국회 임기를 시작한 뒤 역대 세 번째로 긴 82일(8월 19일) 만에야 겨우 원 구성 협상을 마치고 ‘지각 개원’을 하더니 이후 추가경정예산안과 예산안 처리 등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다.

한나라당은 한판 승부를 겨뤄야 할 쟁점법안 처리를 놓고 민주당과 줄다리기를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대폭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지적을 종합해보면 최근 ‘법안 전쟁’ 국면에서 한나라당의 패착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피아(彼我)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은 협상 초기부터 김형오 국회의장이 법안 직권상정을 해 준다는 전제 아래 민주당을 압박했다.

114개니 85개니 하는 ‘직권상정 법안’ 리스트를 작성해 민주당이 합의를 해주지 않으면 강행 처리를 할 것처럼 위협했다.

여기에는 김 의장이 무조건 여당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김 의장 측의 기류는 달랐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직권상정을 해 줄 사람은 고민 중인데 지도부는 마치 직권상정이 손안에 든 카드인 것처럼 행동했다”며 “애를 배지도 않았는데 임신 증세가 나타나는 ‘상상 임신’과 별로 다른 게 없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의 전략을 사전에 간파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한 점도 한나라당이 밀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민주당은 크리스마스 직후인 지난해 12월 26일 본회의장을 기습 점거해 물리력 경쟁에서 우위에 섰다. 또 협상에서 미디어 관계법을 뺀 나머지 사안들에 대해선 예상을 깨고 탄력적인 대응을 보였다.

한나라당 정책위 관계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과 금산분리 관련 법안 처리는 민주당이 정체성과 지지층 결속 차원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고, 이 때문에 협상이 깨지면 어쩔 수 없이 직권상정을 할 수밖에 없는 명분이 생길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는 완전히 오판이었다”고 털어놨다.

당내 주류인 친이(親李·친이명박)계가 홍준표 원내대표를 너무 믿었다는 점도 협상을 그르친 요인으로 꼽힌다.

친이계는 집권 2년차인 올해를 실질적인 ‘개혁 원년’으로 삼고 지난해 말까지 각종 법안을 통과시켜 제도적인 인프라를 만든다는 게 절대 목표였다.

그러나 협상의 전권을 위임받은 홍 원내대표는 한편으로는 야당을 밀어붙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를 통한 원만한 처리를 시도하는 강온양면 전략을 택했다.

본인의 향후 정치 행보를 감안해 국회 파행에 대해선 지나치게 부정적이었다고 친이계 의원들은 말한다.

친이계의 한 의원은 “홍 원내대표는 김 의장이 손에 흙을 안 묻히려는 ‘스타일리스트’라고 비판했지만 홍 원내대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며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격”이라고 말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동아닷컴 정주희 기자


▲동아닷컴 박태근, 이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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