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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월 30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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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 감축 등 조직 개편 작업이 진행 중인 관가에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행정자치부를 통해 강도 높은 ‘조직 슬림화’를 요구하자 통합되는 부처들이 축소 규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고 있다.
이 때문에 행자부에 설치된 정부기능·조직개편 추진단이 구체적인 조직 개편안을 29일까지 내라고 요구했지만 많은 부처가 시한을 지키지 못했거나 조정 여지가 많은 미완성 안을 제출했다.
일부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조직법 개정안 거부 시사 발언으로 문제가 복잡하게 꼬이자 ‘일단 시간을 벌고 보자’는 지연작전을 쓰는 듯한 조짐도 있다.》
○ “너 아니면 내가 죽는다”
하나의 조직 개편안을 내야 하는 통합 예정 부처들에 이번 협상은 사활이 걸린 문제다. 밀리는 쪽이 사람과 기능을 많이 줄여야 한다.
기획재정부로 통합되는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는 조직 개편 문제를 위해 수차례 협의를 가졌지만 이견을 줄이기는커녕 감정싸움으로 치닫고 있다. 재경부 관계자는 “옛 재정경제원 시절 1개 실(室)에 불과했던 예산처가 1 대 1 대등합병을 하자고 하는 건 무리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반면 예산처는 “인수위가 발표한 정부조직 개편 자료를 보면 예산처에 재경부가 흡수되는 것”이라며 “사실 재경부 기능이 여기저기 흩어지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재경부는 또 ‘경제 규제 50건당 인력 1% 감축’ 원칙을 두고서 금융감독위원회와 갈등을 빚고 있다. 재경부는 금감위로 넘어가는 금융정책 관련 규제는 금감위가 규제 건수에 포함시켜 인력을 줄여야 한다고 보지만 금감위 측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한다.
해양수산부의 해양개발, 해운물류 등의 기능과 합쳐 국토해양부가 되는 건설교통부는 건교부 정원 4100여 명, 해양부 정원 2100여 명 등 6200여 명을 5600∼5700명 선으로 줄여야 한다. 건교부 관계자는 “현 정원을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는 해양부의 요구가 말이 되느냐”며 분개했다.
○ 일부 부처 논의할 엄두도 못 내
외교통상부와 통일부는 ‘통일부 조직을 외교부의 어디에 배치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현재 가장 유력한 안은 외교부의 제2차관 자리를 통일부에 내주고 산하에 현 통일부의 정책홍보본부 남북회담본부 등을 두는 방법이지만 외교부 반발이 만만찮다.
사업부서 인원의 10%를 줄여야 하는 문제도 논란거리. 외교부 관계자는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데에는 공감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줄일지가 큰 문제”라고 말했다.
해양부의 어업수산정책을 흡수해 농수산식품부로 확대되는 농림부는 해양부와 인력 감축 등에 대한 논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농림부 당국자는 “해양부 장관, 차관 등이 부처 폐지를 번복시키기 위해 뛰고 있어서 그런지 해양부 쪽에 문제를 논의할 공식라인이 없어 의견 조율을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실무자들에게 농림부에 넘어올 인력과 조직 현황 등을 몇 차례 받았는데 그때마다 수치가 다를 정도.
정보통신부의 디지털 콘텐츠 정책과 국정홍보처의 해외홍보 기능을 흡수하는 문화관광부 관계자도 “정통부와 홍보처의 인력이 어느 정도 넘어오게 될지 몰라 조직 개편을 위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현재 정원 622명을 300명으로 줄여야 하는 총리실은 감축안을 짜고 있지만 도저히 인수위가 제시한 목표를 맞출 수 없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또 과학기술부의 일부 기능을 흡수하는 교육인적자원부는 과기부가 산업자원부와 예산처로 떼어 줘야 하는 기능들을 전부 교육부로 가져오려고 해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여성가족부, 청소년위원회와 합칠 때 150여 명의 과잉 인력이 생긴다. 여기에 80여 건에 이르는 경제 규제 건수에 따라 13명 정도를 추가로 줄여야 하지만 일부 규제의 기준이 모호해 감원 규모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행자부는 통합 예정인 정보통신부의 기능 중 일부가 대통령 직속 방송통신위원회로 빠져나가지만 방통위로 이관되는 인원을 알지 못해 정원 산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국정 공백에 대한 우려도 많아
조직 개편 문제가 난항을 겪으면서 공무원들은 중요 현안을 면밀히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경제 부처의 한 공무원은 “부처 통합 후 자리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어서 사안을 진단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게 공허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에 따른 대책,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등 산적한 현안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국정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중장기 업무계획 수립을 중단한 채 기본적인 업무만 하고 있다”며 “이미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간부회의를 하지 않은 지 오래”라고 전했다.
부처 통합을 앞둔 모 부처의 혁신인사기획관은 “정원 조정을 서두르기보다는 다른 부처 동향을 살피면서 눈치를 보고 있다”며 “새 정부 출범을 전후해 정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료들이 의외로 많다”고 말했다.
<편집국종합>
정리=신치영기자higgl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