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남북정상회담]회담 하루 연장 왜 제안했나

  • 동아일보
  • 입력 2007년 10월 4일 03시 02분



《3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간의 정상회담은 “일정을 하루 연장해 모레(5일)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는 김 위원장의 ‘깜짝 제안’ 탓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김 위원장의 파격 제안에 대해 남측 상황실 관계자들은 사실상 이를 수용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정상회담 일정이 하루 연장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당초 일정대로 4일 회담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노 대통령을 수행 중인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김 위원장이 회담 말미에 “충분히 대화를 나눴으니 (연장) 안 해도 되겠다. 남측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본래대로 합시다”며 자신의 제안을 철회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노 대통령이 체류 일정 연기 요청을 사실상 ‘거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회담이 의미 있는 합의를 도출하기보다는 ‘평화선언’ 형태의 추상적인 선언 수준의 결과물을 내고 막을 내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왜 연장을 제의했나=김 위원장은 이날 오후 2시 45분경 백화원 영빈관에서 속개된 정상회담 2차 회의 모두발언에서 “내일(4일) 오찬을 평양에서 여유 있게 하시고 오늘 일정들을 내일로 늦추는 것으로 해 모레 서울로 돌아가시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형식적으로는 정상회담 1차 회의를 한 결과 논의할 의제가 많고 남북 간 시각차가 크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을 갖고 차분하게 논의하자는 의도로 보였다. 일부 당국자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더 많은 이슈가 폭넓게 논의될 가능성이 커졌다”면서 “이번 회담에 대한 김 위원장의 의지가 엿보인다”며 회담 연장을 기정사실화했다.

일각에서는 회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김 위원장 특유의 전술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미리 정해진 ‘게임의 룰’을 사전 예고 없이 바꿈으로써 노 대통령이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회담장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였다는 것.

실제로 김 위원장은 이날 첫 회의는 당초 예정보다 26분 앞당겼고, 두 번째 회의는 15분 정도 늦게 시작하는 등 합의와 무관하게 자신의 뜻대로 회담을 진행시키는 등 국제 관례에 어긋난 모습을 보였다.

중앙대 제성호 교수는 “첫 번째 회담을 마친 뒤 일종의 베팅을 해야 한다고 판단을 한 김 위원장이 나름의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상회담 의전에 밝은 한 정부 당국자는 “자연재해 등 천재지변이 아닌 상황에서 정상의 일정을 그것도 회담 중에 연장하자고 하는 것은 선례가 없는 일”이라며 “상대방을 편하게 해준다는 의전의 기본에 입각할 경우 외교적 비례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천 대변인은 “김 위원장의 일정 연장 제의는 충분한 대화를 통해서 회담의 성과를 높이고 예정된 일정을 다하고 가셨으면 하는 취지의 호의였다”고 주장했다.


▽왜 연장을 수용하지 않았나=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제의에 대해 즉답을 피한 채 “나보다 더 센 데가 두 군데가 있는데 경호, 의전 쪽과 상의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받아넘겼다.

김 위원장이 “대통령이 결심하시면 되는데…”라며 아쉬움을 표하자 노 대통령은 “큰 것은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결정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장고(長考)가 이어졌고 오후 2시 45분부터 4시 25분까지 1시간 40분가량 진행된 정상회담 2차 회의 말미에 양 정상은 결국 회담 일정을 연장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노 대통령은 회담 기간을 하루 더 연장하더라도 손에 잡히는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 1차 회의를 마친 뒤 남측 수행원과 평양 중구역 옥류관에서 가진 오찬에서 “한 가지 쉽지 않은 벽을 느꼈다”며 “남측이 신뢰를 가지고 있더라도 북측은 아직도 남측에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노 대통령이 느낀 ‘벽’은 남측의 대북정책이 궁극적으로는 북한을 개혁 개방으로 이끌어 체제 붕괴를 노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의심인 것으로 보인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미국의 침공보다 북한이 더 무서워하는 것은 남한의 흡수통일”이라고 말했다.

▽알맹이 없는 회담의 전조?=남북은 두 차례의 정상회담 끝에 합의사항을 4일 오전 공동선언 형식으로 발표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 당국자들은 “충분히 대화를 나눴으니 (연장) 안 해도 되겠다”고 말한 김 위원장의 발언이 이 같은 긍정적인 기류의 반영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일 수도 있다. 4시간 안팎의 회담을 한 결과 큰 진전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굳혔을 수도 있다는 것. 공동 관람이 예상됐던 아리랑 공연장에 김 위원장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고려대 남성욱 교수는 “2박 3일이 3박 4일이 되더라도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느꼈다는 발언으로 들린다”며 “실질적인 조치보다는 추상적인 선언 차원의 선언문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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