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대통령의 편리한 公私 구분법

  • 입력 2007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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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잦은 지방 나들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임기가 끝나가면서 그동안 미뤄 놓았던 대통령의 사적(私的)인 약속을 지키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도 주말엔 쉴 권리가 있다. 그래야 평소의 격무를 이겨낼 수 있다. 문제는 왜 굳이 대통령을 ‘공적 영역의 대통령’과 ‘사적 영역의 대통령’으로 나누려느냐는 것이다. 그런 발상은 대통령 스스로가 ‘대통령’의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국정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대통령에게 사적 영역이 있다는 주장부터가 이해하기 어렵다. 원로 헌법학자인 허영 명지대 초빙교수는 최근의 칼럼에서 “대통령이라는 공직은 자연인으로서의 신분을 허용하지 않는 통치권의 표징”이라면서 “대통령의 청와대 사생활, 가족관계, 휴가여행 등 지극히 사적인 영역까지도 대통령직의 공직수행과 불가분의 연관성이 있다”고 말했다. 바른 지적이다.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당선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을 때 이를 ‘사적인 일’로 분류할 수 있는가.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참여정부평가포럼에 강연하러 가고, 원광대에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러 가는 것도 결코 사적인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당원들에게 편지를 쓸 때는 ‘수석당원’이고, ‘정치 이렇게 가선 안 됩니다’란 글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띄울 땐 ‘정치인’이며, 선거법 문제와 관련해 헌법소원을 제기할 땐 그냥 ‘개인 노무현’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국민이 혹여 잊기라도 했을까봐 자신이 대통령임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강연 때면 내용 중에 ‘대통령’이란 표현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주 나온다. 지난주 대선후보들의 공약을 조사하라고 지시할 땐 “대통령의 명령”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편의에 따라 공인(公人)이 됐다, 사인(私人)이 됐다 하는 나라는 없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냥 ‘대통령 부시’일 뿐이다. “개인 부시로서…”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대통령의 신분이 공(公)과 사(私)의 영역을 오가면 국정의 중심이 서지 않고 국민의 신뢰도 모아지지 않는다. 여기서 법치의 위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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