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용-문용희씨 부부 “납북자 돕는 일 멈출 수는 없지요”

  • 입력 2006년 9월 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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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납북자 가족은 배제한 채 전후 납북자 지원 특별법위원회를 만드는 데 반대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왼쪽). 그의 외로운 단식을 지켜보며 눈물을 삼키는 아내 문용희 씨는 남편 앞에서는 “나라가 할 일을 당신이 대신한다”며 애써 격려의 말을 건넨다. 임우선 기자
정부가 납북자 가족은 배제한 채 전후 납북자 지원 특별법위원회를 만드는 데 반대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왼쪽). 그의 외로운 단식을 지켜보며 눈물을 삼키는 아내 문용희 씨는 남편 앞에서는 “나라가 할 일을 당신이 대신한다”며 애써 격려의 말을 건넨다. 임우선 기자
8일 오후 3시 반경 서울 종로구 계동 해양수산부 4층. 단식 4일째를 맞은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53) 대표는 푸석한 얼굴로 7월 입법 예고된 ‘전후 납북자 지원 특별법’ 자료를 살폈다.

최 대표는 정부가 제주4·3사건 특별법이나 거창사건 특별조치법과 달리 전후 납북자 지원 특별법 위원회에 가족 대표를 포함시키지 않은 데 항의해 5일부터 단식을 시작했다. 그는 “정부의 전후 납북자 정책에 대한 비판이 귀에 거슬리니까 가족 대표는 쏙 빼고 정부와 ‘코드’가 맞는 사람으로 위원회를 만들겠다는 것 아니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같은 시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중국음식점 앞에선 최 씨의 부인 문용희(48) 씨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문 씨가 전날 주방 냉장고에 넣어 놓은 녹즙을 지배인이 쓰레기로 착각해 내다 버린 것. 녹즙은 단식 중인 남편에게 주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6월부터 이 식당에서 주방보조 일을 하고 있는 문 씨는 말도 못한 채 가슴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눈물로 달래야 했다.

최 대표는 2000년 납북자가족모임을 만든 이후 전후 납북자 4명과 국군포로 수십 명을 북한에서 탈출시켰다. 고교 1학년 때 선유도에서 납북된 김영남 씨 모자의 상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납북자 문제 해결에 전념하면서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탈북자 1명을 국내로 데려오려면 많게는 수천만 원이 필요했지만 마땅히 도움 받을 곳이 없었다. 결국 그는 사비를 털었고 수억 원의 빚까지 졌다.

최 대표가 15년간 다니던 충남 서천수협을 지난해 6월 그만둔 뒤로 최 대표 부부는 두 딸의 서울 사글셋방에 얹혀살고 있다.

문 씨는 “남편이 납북자를 탈출시키기 위해 중국으로 갈 때면 피가 마를 정도로 초조하다”며 “왜 하필 당신이 그 일을 해야 하느냐며 싸우기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납북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 가득 담고 있는 최 대표에게 이 일은 숙명이다. 풍북호 선주였던 그의 부친은 최 대표가 14세 때인 1967년 배를 타고 나갔다가 납북됐다.

최 대표는 2000년 중국에서 만난 한 탈북자에게서 자신의 아버지가 1970년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됐지만 그는 그 소식을 접한 뒤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게 됐다고 했다.

납북자나 국군포로가 국내로 들어와 가족을 만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자신의 일처럼 가슴이 벅찼다. 문 씨도 그런 남편을 더는 말릴 수 없어 남편 몰래 식당일을 시작했다. 문 씨는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식당일이 고되지만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누군가는 나서야 하지 않느냐”며 “이젠 정부 대신 일하는 남편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골을 일부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의 유골이라도 찾으면 함께 묻어 달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드리기 위해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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