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때 수몰 조세이 탄광 韓人생존자 첫 확인

  • 입력 2006년 4월 22일 03시 03분


코멘트
日사과 받는게 마지막 소원일본 조세이 탄광의 한국인 강제 징용자 가운데 생존자로 처음 확인된 김경봉 씨가 21일 자택에서 강제 징용 당시 경험을 적은 공책을 보여 주고 있다. 숨지기 전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원이다. 홍진환 기자
日사과 받는게 마지막 소원
일본 조세이 탄광의 한국인 강제 징용자 가운데 생존자로 처음 확인된 김경봉 씨가 21일 자택에서 강제 징용 당시 경험을 적은 공책을 보여 주고 있다. 숨지기 전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원이다. 홍진환 기자
“日, 원혼앞에 사죄는 못할망정 또 생떼라니”

《“수많은 한국인 징용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본이 사죄는커녕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을 보면 치가 떨려.” 21일 서울 강서구 방화동 10여 평짜리 아파트에서 만난 조세이(長生) 탄광 생존자 김경봉(金景峯·84) 씨는 생지옥 같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몸서리를 쳤다. 김 씨는 1942년 수몰돼 130여 명의 한국인이 희생된 조세이 탄광에 동원된 강제징용자 가운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된 생존자다. 일본 야마구치(山口) 현 우베(宇部) 시 조세이 탄광은 해저 10여 km까지 갱도가 뚫려 있던 일본 최대의 해저탄광이다.》

▽생지옥 같던 수몰현장=1922년 경북 포항시 기계면에서 태어난 김 씨는 1941년 7월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 경찰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조세이 탄광에 끌려갔다.

수몰사고가 발생한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 반경 김 씨는 전날 오후 5시부터 이어진 16시간의 채탄작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갱구(탄광 입구) 근처에서 ‘물비상이 났다’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바다 위로 불쑥 나와 있는 환기구에서 검은 연기와 물기둥이 솟았지.”

어른 허리 높이 정도에 불과한 좁은 갱도의 버팀목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바닷물이 순식간에 갱도 전체를 채웠다. 탄광 측은 인근 마을이 침수될 위험이 있다며 탄광 입구를 틀어막아 당시 갱 안에 있던 강제징용자들은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일본 측은 이 사고로 숨진 탄광 노동자는 한국인 징용자 133명을 포함해 모두 183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 씨는 늘 200명 이상이 채탄작업을 했기 때문에 희생자가 200명을 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탄광 측은 사고재발 위험이 높다는 이유로 시신 발굴도 하지 않은 채 탄광을 폐쇄했다.

▽끝나지 않는 악몽=김 씨는 수몰사고가 발생한 지 사흘 만에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탄광을 탈출했다. 당시 조세이 탄광은 강제징용자들이 묵던 숙소 곳곳에 망루를 세우고 삼엄히 감시했다. 탄광 측은 탈출한 강제징용자를 잡아오는 주민들에게 쌀 한 가마니씩을 줬다. 붙잡힌 강제징용자들 중 상당수는 무자비한 폭행으로 숨을 거뒀다.

또 수많은 한국인 징용자가 채탄작업 중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과 전염병으로 숨졌다. 김 씨도 콜레라에 걸려 의식을 잃은 적이 있다. 일본인 의사는 김 씨를 화장터로 보내게 했으나 함께 징용됐던 고향 선배가 가까스로 구했다.

김 씨는 효고(兵庫) 현의 한국인 집에 숨어 지내다 1945년 들켜 군대로 끌려갔으나 곧 광복을 맞이해 그해 10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강제징용 당시 폭행을 당한 후유증으로 오른팔을 거의 쓰지 못하는 김 씨는 6·25전쟁 땐 청력마저 잃은 상이군인이다.

부인과 함께 힘겹게 살고 있는 김 씨는 몇 년 전부터 한글을 배워 자신이 겪은 일들을 공책에 적고 있다.

“죽기 전에 뻔뻔한 일본한테 제대로 된 사과 받지 못할 것 같으니 가슴의 한을 풀려면 뭔가 남겨야지.”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1942년 2월 韓人 130여명 희생▼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1942년 2월 130여 명의 한국인이 희생된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는 1915년 235명이 희생된 히가시미조메(東見初) 탄광 수몰사고에 이은 두 번째로 큰 참사였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해 4월 조세이 탄광을 첫 진상조사 대상으로 결정하고 같은 달 20∼28일에 현지 조사에 나섰으나 조세이 탄광 주식회사가 1974년 파산해 실태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위는 김경봉 씨의 증언을 토대로 25일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나설 계획이다. 당시 수몰사고 유족들은 1992년 조세이 탄광 희생자유족회를 세우고 매년 추모식을 열어 유골 발굴과 위령비 건립을 호소하고 있으나 일본 당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