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문홍]南北, 자유의 모래시계

  • 입력 2005년 1월 25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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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언론사 입사 때 논문시험 제목이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논하라’였다. 답안을 어떻게 썼는지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자유의 창(窓)에서는 평등이 내다보여도 평등의 창에서는 자유가 보이지 않는다”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미국의 민주주의’를 저술한 19세기 프랑스 학자)의 말을 인용했던 것은 기억난다.

요즘 나라 안팎에서 거론되는 ‘자유’에 대해 생각하다가 떠오른 이 말이 새삼스레 가슴에 와 닿는다. 남북한의 현 상황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묘사해 주는 말도 드물겠다는 느낌 때문이다. 유럽에 민주주의가 정착되기도 전에 나온 한 자유주의 사상가의 금언(金言)이 160여년 뒤의 한반도에 적용될 수 있다니…. 이건 시대를 초월한 사상가의 예지력을 칭송할 일인가, 아니면 시대에 뒤처진 한민족의 아둔함을 탓할 일인가.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로 물적(物的) 토대 마련에 성공했다. 이만하면 제도적 민주화도 정착됐다. 국민 다수가 반만년 한민족 역사상 전례 없는 자유를 누리게 됐고, 자유의 창가에서 평등을 내다볼 여유가 생겼다. 지난 2년간 분배를 강조해 온 노무현 정부가 그 증거다.

반면 자유보다 평등을 앞세운 북한의 결과는 참혹하다. 자유의 기운은 지구상에서 가장 희박하고, 남은 것은 ‘다 같이 못 사는’ 평등뿐이다. 북한 주민이 평등의 창을 통해 내다보는 세상에 ‘사회주의 낙원’은 없다. 거기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이 지배하는 비정한 정글,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 사회가 있을 뿐이다.

자유를 척도로 본 한반도는 마치 작동을 멈춘 모래시계와 같다. 모래(자유)는 시계의 아래쪽 남한에 몰려 있다. 자유가 많다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지만, 자유에 따르는 책임과 자기절제가 따라 주지 않는 게 문제다. 공동체의 안녕을 위협하는 갖가지 주의 주장들, 끝없는 갈등을 양산하는 집단·지역 이기주의는 저마다 자유만 챙기고 책임은 망각한 소치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출범한 자유주의연대는 ‘책임 없는 과잉(過剩) 자유’를 경계하자는 취지라고 이해하고 싶다.

모래시계의 위쪽, 빈 공간은 어떤가. 그나마 북한 정권이 주민을 굶기지 않았던 시절에는 자유가 없어도 그럭저럭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장기적인 물질의 결핍은 필연적으로 내부 기강의 이완을 부르고, 자유를 요구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키운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북한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겠다고 나섰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자유의 확산’ 취임사를 통해 그 같은 의지를 공식 선언했다. 북한의 모래시계는 안팎에서 채워질 것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 ‘자유 모래시계’는 불균형적이다. 훗날 평화통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금부터 그 불균형을 해소하는 노력을 시작했으면 한다. 남쪽은 주어진 자유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유를 오·남용하지 않는 방안부터 고민해야 한다. 북쪽이 파국적 상황을 피하고 싶다면 자발적으로 자유의 씨앗을 뿌리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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