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한국의 사법부는]<下>‘대륙’에서 ‘영미’로

  • 입력 2004년 8월 3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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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체계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대륙법계에 속했다. 대륙법은 독일 프랑스 스위스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대륙 여러 나라의 법을 의미하는데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영미법과 대비된다.

최근 법체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지고 있다. 법원행정처 간부와 대법관을 지낸 한 변호사는 “최근 법원의 판결 경향이 놀랍도록 변하고 있다”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대륙법계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엄격한 증거, 무거운 판결=대법원은 3월 전직 검사 조모씨(42)가 자신을 ‘한심한 검찰’이라고 묘사한 방송사와 취재기자를 상대로 낸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에서 ‘배상할 필요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조씨의 명예가 훼손된 점은 인정하면서도 “문제의 보도는 특별히 악의적이거나 부당한 공격이라고 볼 수 없어 위법하지 않다”는 것.

이에 앞서 서울중앙지법은 한나라당이 이른바 ‘병풍(兵風) 비리’ 폭로와 관련해 인터넷 매체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명예훼손과 위법성을 모두 인정하면서 1억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명예훼손 사건에서 배상액수가 억대를 넘어선 것은 이례적인 일.

위의 두 판결은 우리 법원이 미국 판례의 경향을 따르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미국 법원은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되 그 한계를 넘으면 매우 엄한 책임을 묻는다.

일반 형사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배심재판은 배심원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사실인정에 합의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범죄혐의) 인정이 매우 까다롭다. 그러나 일단 범죄 사실이 인정되면 판사는 높은 형량을 선고한다. 올 초 이후 진행된 대선자금 수사 피고인들의 재판은 이런 경향을 보여준다.

▽법적 안정성보다는 구체적 타당성=대륙법 체계는 법전의 법규 내에서만 판결을 하며 따라서 전체적인 법적 안정성이 중시된다. 반면 영미법은 개개의 사건에서 구체적 타당성과 정의가 강조된다.

대법원의 한 중견판사는 “이전에는 법에 이렇게 돼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판결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요즘 판사들은 개별 사건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추구하면서 적극적으로 개인의 권리를 구제하는 방향으로 법을 해석한다”고 말했다.

재독학자 송두율(宋斗律)씨에 대한 판결도 미국 판례와 닿아 있다. 재판부는 송씨의 주요 공소사실인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혐의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범죄의 증명이 없다’며 이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와 같은 ‘합리적인 의심 배제’의 법리는 미국 판례에서 확립된 것으로 이제 우리 법원에서 보편적으로 채택되고 있다.

▽사법개혁의 방향=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법개혁 논의에서는 미국 법의 영향이 더욱 거세다.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는 국민의 사법참여 방안으로 배심제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또 일정 기간 변호사나 검사로 활동한 경력자를 법관으로 임용하는 법조일원화도 뿌리는 미국에 있다.

미국 변호사로 국내 사법기관에 정식 채용된 최초의 외국인인 션 헤이즈(31·헌법재판소 연구관)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반갑기도 하지만 우려도 많다고 말했다. 미국과 한국의 법 현실이 다른 데다 미국의 법체계에도 부정적인 면이 많은 반면 한국의 사법시스템에 좋은 점이 많다는 것.

그는 “낮은 범죄율과 높은 범인 검거율, 법적 안정성, 신속하고 효율적인 재판 등이 한국 사법시스템의 장점”이라며 “이 같은 장점을 잘 보존하면서 미국 법 제도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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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기자 sooh@donga.com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美학위 못따면 법대교수 꿈못꿔"▼

법의 중심이 유럽 대륙에서 미국으로 바뀌면서 법학도와 학자, 법조인들의 유학지도 크게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대륙법계 국가’답게 주로 독일과 일본 등으로 유학이나 연수를 떠났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2000년부터 올해까지 해외연수를 다녀왔거나 연수 예정인 법관 216명 가운데 153명(71%)이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영미법계 국가를 택했다. 반면 대륙법계 국가인 독일과 일본 스위스 등을 택한 법관은 69명(27%)에 불과했다. 나머지 4명은 중국행. 미국만을 놓고 보면 2000년 23명에서 올해에는 30명으로 늘었다. 반면 올해 독일행을 택한 법관은 3명에 불과했다.

법학도들도 미국행을 많이 택한다. 위스콘신대 로스쿨 등 미국의 주요 주립대 로스쿨에는 2000년 이후 매년 10∼20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몰려들고 있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시 소재 워싱턴대 등 사립대도 사정이 비슷하다. K대학 강사 김모씨는 “요즘 미국에서 학위를 못 따면 법대교수 임용에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고 말했다.

로스쿨 열풍이 불면서 학생들이 유학가는 대신 미국 로스쿨이 한국에서 문을 열기도 한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노스웨스턴대 로스쿨은 지난해 3월 로스쿨 석사과정(LLM)을 한국에서 개설했다. 학비가 1년 과정에 3만3000여달러(약 3800만원)로 만만치 않은데도 지난해 25명이 입학해 수료했고 올해에는 35명이 등록했다.

대법원의 한 판사는 “독일에 가면 독일법과 관련된 것만 공부할 수 있지만 현재 모든 학문의 흐름이 영어로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에 가면 전 세계의 법 관련 자료들을 접할 수 있다”며 “법 공부도 미국이 유리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대세”라고 말했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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