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前대통령 수도이전’ 왜곡 논란

  • 입력 2004년 6월 21일 18시 54분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임시행정수도 건설 계획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병완(李炳浣)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20일 기자간담회에서 “1978년 박 전 대통령의 연두회견을 찾아보니 묘하게도 지금의 취지와 일치하더라”며 ‘수도권 과밀 해소’가 주된 목적이라는 발언을 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러나 추진 과정과 목적 및 배경, 성격에서 당시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도 건설 및 이전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게 박 전 대통령 시절의 임시행정수도 건설 계획 프로젝트(백지계획)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증언이다.》

▼왜 옮기려 했나▼

▽목적은 안보, 수도권 과밀 해소는 명분=박 전 대통령은 안보 차원에서 서울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시했으며 이에 대한 필요성으로 임시행정수도 이전을 구상했다. 김정렴(金正濂)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 2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78년 연두회견에서 박 전 대통령이 밝힌 ‘수도권 과밀 해소’는 대외관계를 염두에 둔 명분용이었다”며 이 수석비서관의 해석과 큰 차이를 보였다.

76년 임시행정수도 건설 프로젝트의 초안작업을 했던 최상철(崔相哲·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도 “박 대통령이 제시한 ‘11개 후보지 조건’을 보고 후보지 선정에서 ‘안보’를 최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당시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를 통해 전달받은 후보지 조건은 △휴전선으로부터 최소한 200km 거리 △천안 이남 △충주 동쪽 △논산 서쪽 △서울에서 전철이나 자동차로 1시간∼1시간반 등이었다는 것. 200km는 당시 북한이 보유하고 있던 프로그 미사일의 최대 사거리. 이 때문에 실무팀은 현 정부가 후보지로 선정한 충남 천안시, 공주시 장기면, 충남 연기군, 충북 음성군을 포함해 모두 7곳을 후보지로 하는 NC(New Capital)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와 관련해 김의원(金儀遠·전 경원대 총장) 당시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은 76년 8월 청와대로 불려가 박 전 대통령에게서 임시행정수도 건설과 관련해 좀더 명확한 지침을 받았다.

“평양이 휴전선으로부터 160km에 있다. 반면 서울은 휴전선과 지척에 있고 ‘서울권’ 인구가 600만명이다. 미사일이 떨어질 수 없는 거리에 행정수도를 새로 만들어 김일성과 같은 조건으로 싸우겠으니 합당한 후보지를 선정하라. 서울의 인구분산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결국 안보가 임시행정수도 건설의 최우선 고려 대상이었으며 수도권 과밀 해소는 부수적인 효과였던 것이다.

실제 나중에 오원철(吳源哲) 대통령제2경제수석비서관 겸 중화학기획단장이 총괄 지휘한 ‘백지계획’ 최종 보고서도 공중습격을 고려해 지하공간에 역점을 두었다.

▼천도였나▼

▽천도가 아닌 임시행정수도=박 전 대통령은 천도가 아닌 행정기구의 임시 분산을 염두에 두었다. 김 전 국장과 최 교수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행정기능을 잠시 옮기는 것이다. 서울은 그대로 서울의 역할을 할 것이다. 통일이 되면 서울로 돌아온다”고 비장한 어조로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한다.

따라서 관련법도 ‘임시행정수도 건설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했다. 일부에서 ‘임시’라는 말 때문에 추진력을 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 ‘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으로 바꿀 것을 건의했으나 박 전 대통령은 “통일 후엔 어떻게 할 것이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는 게 관련 인사들의 전언이다.

▼계획추진은▼

▽국가자원 낭비의 최소화=박 전 대통령의 임시행정수도 건설 구상은 75년 1월 캄보디아, 4월 베트남 패망에 따른 안보위기감 때문이었다고 김 전 비서실장은 회고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1년여 간의 고민 끝에 학계와 정부부처 실무진에 대한 검토를 지시한 데 이어 77년이 돼서야 첫 언급을 할 정도로 오랜 준비기간을 거쳤다.

또 한정된 국가자원을 감안해 최소 10∼15년 이상의 건설기간을 계획했다. 이와 관련해 김 전 실장은 “박 대통령의 과감한 추진력을 감안할 때 임시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신중함은 대단히 놀랄 정도였다”고 밝혔다. 이는 엄청난 비용과 시행착오에 따른 국가자원 낭비의 최소화, 임시행정수도 건설에 따른 수도권 주민들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서였다는 게 당시 인사들의 전언이다.

반병희기자 bbhe424@donga.com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임시행정 수도 추진 일지
시기실무팀과정
1975년 8월-박 대통령, 진해 하계휴양지에서 비보도를 전제로 기자들에게 “북과 수도권 인구증가를 생각할 때 행정수도를 이전해야겠다”고 첫 언급
1976년 5월 말김종필 전 국무총리박 대통령, 김 전 총리에게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했으니 임시행정수도 건설 프로젝트를 맡으라”고 주문
6월초최상철 주종원 서울대 교수김종필 전 총리, 두 교수에게 “임시행정수도 후보지를 복수로 선정해 달라”고 주문
8월초 장기 충주 천안 음성 등 7곳을 선정한 ‘NC(New Capital)’보고서 작성 완료. 박 대통령에게 보고됨
8월김재규 건설 장관, 김의원 건설부 국토계획국장박 대통령, 두 사람에게 NC보고서를 건네며 “안보문제를 염두에 두고 임시행정수도 건설 작업을 추진하라”고 지시
1977년 2월 10일박 대통령, 서울시청 초도순시에서 “서울 인구 분산을 위해 1시간 거리에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하는 구상을 하고 있다”고 밝힘
1977년 3월청와대에 신수도건설 실무기획단 발족(단장: 오원철 대통령제2경제수석비서관 겸 중화학기획단장)박 대통령, 오 단장에게 임시행정수도 관련 프로젝트를 총괄할 것을 지시
1977년임시행정수도 건설에 관한 특별조치법 마련
1977∼78년오 단장, ‘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백지계획’안 마련. 이어 후보지 선정에 관한 1차 보고서 작성. 충남 장기, 임시행정수도 후보지로 잠정적 선정
1978년 1월박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에서 ‘수도권 과밀 대책’과 ‘안보’상의 이유로 임시행정수도 건설 계획 밝힘
1979년 가을임시행정수도의 도시계획 완료 등 백지계획 최종 보고서 작성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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