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나바시 요이치 칼럼]美-日-北 ‘젠킨스 딜레마’

  • 입력 2004년 5월 27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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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방북 중 대동강 영빈관에서 일본인 피랍자 소가 히토미의 남편 찰스 젠킨스를 면담하고 일본행을 권했다. 젠킨스씨는 주한미군 근무 중 1965년 월북했다. 이 면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유로 이뤄졌다.

총리는 미국에 신병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면서 ‘보증서’ 비슷한 각서까지 영어로 써 주었지만 설득에 실패했다.

미 국방부는 고이즈미 총리 방북에 맞춰 젠킨스씨는 ①탈영 ②탈영 교사(2건) ③이적행위 ④충성 포기 장려(2건) 등 4가지 죄목을 적용받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일본이 그에 대한 기소면제를 요청하려는 움직임을 견제한 것이다.

미국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에 경고했다. 총리 방북 직전에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이 “기소면제 가능성은 없다”고 못 박았다.

미 정부 고위 관계자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 국방부와 미군은 이라크 포로학대 사건을 해결하고 재출발하려면 법률을 엄격히 적용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젠킨스씨에 대해 특별 배려 운운하는 것은 타이밍이 나쁘다.”

미 당국은 젠킨스씨의 일본행 거부에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일본에 신병 인도를 요구할 상황이 되면 양국간에 긴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젠킨스씨가 일본행을 원했다면 그 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사정할 생각이었을까. 무작정 저지르고 본 것이었을까. 총리 측근이 털어놓듯 ‘이런 것이 정치’였을까. 피랍 일본인의 북한 잔류 가족 8인 전부를 데려올 수 없게 되자 이유를 둘러대기 위한 의식이 필요했던 것일까.

일본 정부는 현재 소가씨의 가족 재회를 중국 등 제3국에서 실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다. 제3국 재회가 실현되면 분명 한발 전진이다.

그러나 체류 기간, 다음 재회 시기, 신변안전 확보 등에 대한 문제가 있는 데다 재회 이후의 후속조치에 대한 전망이 없다.

일본인 피랍자 중 가장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남편과 두 딸을 남겨두고 온 소가씨였다. 그녀가 ‘북한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 일본 정부는 북한을 상대로 교섭하기 어렵다. 이런 점을 노려 그간 북한은 일본인들을 일단 가족에게 돌려보내라고 요구해 왔다.

젠킨스씨는 더욱 약한 처지에 놓여 있다. 탈영병이란 오명 속에 살아 온 그는 아직도 겁에 질린 채 고이즈미 총리에게 “미국은 무서운 나라”라고 말했다. 북한은 그의 이런 처지를 이용해 일본과 협상하고 있다. 젠킨스씨가 북한 잔류를 희망하면 체제 선전이 된다. 이 문제로 미일 관계를 껄끄럽게 만들면 성공이다.

북한은 김 국방위원장이 납치를 사과할 수밖에 없는 처지까지 몰렸다. 큰소리는 치고 있지만 약하다. 부시 정권도 약한 처지에 몰려 있다. 이라크 포로학대 사건으로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급락하고 있어 더 이상 여유가 없다.

“내 인생이 왜 이리 복잡하게 꼬이는지 모르겠다.”

남편의 일본행 거부 소식에 소가씨는 이렇게 한탄했다.

사람들의 약점을 국가는 이용한다. 모든 국가는 제 나라의 약점을 감추려 한다. 이런 여러 약점들이 얽히면서 일은 꼬이게 된다.

후나바시 요이치 일본 아사히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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