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영/라우 獨대통령의 나라걱정

  • 입력 2004년 5월 19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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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정책에 대한 불신이 지금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야당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그 어느 때보다 적다.”

한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 주 일요일(23일)이면 5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낸 마지막 ‘베를린 담화’의 일부이다.

독일 대통령은 매년 한 차례 이 담화를 통해 독일 사회의 주요 사안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정치적 실권이 없는 의전상의 국가 수반이지만 그의 말이 갖는 도덕적 무게는 대단하다.

올해 73세의 노(老)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작심한 듯 무기력증에 빠진 독일 사회를 질타했다.

우선 그는 독일 사회가 ‘심각한 신뢰의 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정부와 야당에 대한 불신을 넘어 ‘국민이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신뢰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자신감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는 묻는다.

“우리는 더 이상 옳은 일을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은 아닐까. 일종의 집단우울증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는 신뢰의 위기를 가져온 주범으로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끔찍한’ 정부의 정책 실패, 개혁을 가로막는 로비스트들의 집단이기주의, 야당의 반대를 위한 반대, 노력 없이 안락함을 누리려는 국민의 나태한 자기만족 등을 들었다.

라우 대통령이 이례적인 담화를 낼 정도로 현재 독일의 상태는 심각하다. 2001년 이후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10.7%에 이르는 높은 실업률은 독일 국민의 자부심이었던 ‘최강의 경제’에 대한 신뢰를 잃게 했다.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화가 도입되면서 독일 경제력의 상징이었던 마르크화는 역사의 장으로 사라졌다.

월드컵 3회 제패의 영광을 선사했던 국가대표 축구팀마저 1990년대 들어 하강곡선을 그리더니 지난달 루마니아에 1-5로 참패해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자탄(自歎)이 나올 지경이다.

라우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 엘리트들은 공동의 선을 뒷전으로 미룬 채 이기주의와 탐욕만 앞세우고 있다고 걱정했다. 특히 관료들과 기업 경영진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을 잃은 채 서민들을 쥐어짜면서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채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책 실패는 유권자들의 냉소주의를 증폭시켜 자칫 (히틀러와 같은) 포퓰리스트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현재의 독일 상황이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고 비관론에 매몰돼 미래를 헤쳐 나가려는 추진력을 상실한 사회 분위기가 진짜 위기라고 본다.

“자신감 상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가 투자와 소비를 위축시켜 국가 경제를 좀먹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위협하고 있다.”

비관적 전망이 사회 전반에 파급되면 경제 주체들이 여기에 맞춰 행동하게 돼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단언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나라에 대해 비관론으로 일관한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미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우 대통령은 해법은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국민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불평을 멈춰라. 각자 더욱 책임감 있게 행동하라. 그리고 근면성, 시간 엄수와 같은 독일의 전통적 가치를 되살리자.”

김상영 국제부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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