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지형/1868년 존슨 - 2004년 노무현

  • 입력 2004년 5월 14일 17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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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5월 미국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이 선고됐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연방 상원의 탄핵심판에서 유죄판결의 정족수인 3분의 2에 1표가 모자라 겨우 파면을 면했다.

존슨은 당시 민주당원이었지만, 남북전쟁으로 황폐화한 미국을 초당적으로 재건하고자 했던 공화당 소속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상생 의지와 지원에 힘입어 부통령이 됐다. 그 뒤 링컨이 암살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연방의회는 공화당, 대통령직은 민주당이 장악한 상황에서 치열한 정쟁과 첨예한 갈등이 시작됐다.

▼정치적 결정에 美법치 퇴보▼

연방의회가 상원의 인준 없이 장관을 해임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키자 존슨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의회는 이를 재의결했다. 하지만 존슨은 이 법률을 의도적으로 위반했다. 의회는 다시 탄핵소추로 맞섰는데, 그 과정에서 상원은 대통령의 명백한 법률 위반에도 불구하고 그의 파면을 거부한 것이다.

상원의 결정은 존슨의 법률 위반이 탄핵 당할 만큼 중대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당시 많은 공화당 중도파의 상원의원들은 존슨이 파면되면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될 임시상원의장 벤저민 웨이드를 혐오했다. 웨이드보다는 그래도 존슨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사건에서 헌법재판소가 내린 기각 결정은 존슨의 탄핵심판 결정과 닮았다. 존슨 사건처럼 헌재는 무엇보다도 대통령 파면 이후에 발생할 정치적 사태를 가장 크게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헌재는 파면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과 국정 공백은 물론이고 국론분열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 이유 때문에 헌재는 노 대통령이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했으며 ‘법치국가 이념’에 위반하는 행위를 했고 ‘헌법수호 의무’를 위반했다고 분명하게 인정하면서도, 이런 위반들이 충분한 탄핵사유는 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정치적 판단이 내재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탄핵은 단순히 개별적인 범죄 행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법치주의, 삼권분립, 공무원의 중립의무와 같은 헌법정신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탄핵소추가 이뤄진 위헌 위법 행위로 볼 때 대통령이 헌법과 법질서를 계속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면 당연히 파면해야 하는 것이다. 존슨 탄핵사건에서 미 상원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집착한 나머지 앞으로 있을 수 있는 헌법정신의 훼손 문제를 백안시하는 실수를 범했다.

오늘날 존슨에 대한 무죄 선고는 미국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퇴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존슨 사건 이후 반세기 이상 미국은 법치주의의 기틀이 흔들리고 내부적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시대를 겪어야 했다. 상원은 소탐대실의 정치적 과오를 저질렀던 것이다. 존슨이 파면되었다면 잠시의 정치혼란은 있었겠지만 법치주의를 보다 빨리 확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당시 미국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를 몹시도 열망하며, 우리 자신이 이룩한 민주주의의 성과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의 그런 열망은 탄핵 관련 시위로 표출되기도 했다. 헌재의 결정에도 이러한 국민의 열망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국민의 열망에 걸맞는 정치를▼

하지만 존슨의 경우에서 보듯이 탄핵소추가 기각됐다고 저절로 민주주의가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탄핵소추가 제기된 배경, 기각 결정이 내려진 이유를 반성하고 성찰할 때에만 법치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체제의 발전이 비로소 확보될 수 있다. 국민이 법질서를 수호하려고 노력할 때, 그리고 대통령과 정치인은 그런 국민의 신임에 걸맞게 행동할 때 우리의 미래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조지형 이화여대 교수·미국법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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