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개혁의 덫

  • 입력 2004년 2월 22일 19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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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급의 전유물이 된 개혁은 A의 악을 B의 악으로 바꾸는 움직임일 뿐이다.”

19세기 이탈리아의 공화주의자 주세페 마치니의 말이다. ‘청년이탈리아당’을 이끌며 반봉건 통일 운동에 앞장섰던 그의 말이기에 더욱 솔깃하다.

마치니의 우려대로, 개혁파들은 개혁의 헤게모니를 독점하려는 ‘덫’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준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으로 존경받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모든 개혁 운동에는 광적인 패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홍위병처럼 윤리적인 선악(善惡)의 칼날로 ‘반(反)개혁’을 몰아붙일 즈음이면, 개혁은 권력의 무기라는 정체를 드러낸다.

개혁의 돛을 올린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25일 출범 1주년을 맞는다. 그 1년, 우리 사회문화는 과연 개혁의 덫에서 자유로웠을까.

노 대통령의 개혁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한 배우는 거침없는 언행으로 관심의 표적이 돼왔다. 한 철학자는 TV 강의에서 “썩은 새끼들”을 남발하며 한국사 속에서 개혁의 정당성을 ‘발굴’하고 나섰다. 한 수능전문채널에서는 전직 대통령들을 “그 자식” 등으로 비하하는 강의가 나가기도 했다. 공영방송들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어른’을 깎아내리는 데도 브레이크가 없다. ‘반미 친북’ 풍조를 우려하는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발언을 “민족의 내일에 걸림돌”이라고 몰아친 것은 그 정점이다. KBS의 전직 고위 간부를 인터뷰하려고 만났을 때 “KBS에서 이 만남도 알고 있을 것”이라며 답변을 꺼리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이 앞섰다. 소설가 이문열씨도 산문집 ‘신들메를 고쳐매며’에서 “애초부터 부정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네거티브 시비를 피하는 게 묘수가 되니, 얼른 보기에 이 나라 논객은 좌충우돌 칼을 휘두르는 그들뿐인 듯하다”고 개탄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취재 기자의 통화내역 조회나 총선을 의식한 듯한 200만개 일자리 창출 등 정부의 행동양식도 개혁의 참뜻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 1년에 대한 평가를 보자.

KBS1 라디오 ‘KBS 열린토론’이 이달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참여정부의 개혁정책이 잘 추진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렇지 못하다’는 응답이 66.7%로 나타났다. 동아일보가 지난 연말 368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2003년이 이전보다 살기 나빠졌다고 한 응답이 76.9%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개혁의 덫’을 의심해야 한다. 청와대가 1년 결산에서 ‘대한민국이 뚜벅뚜벅 앞으로 가고 있다’고 했지만 왜 공감을 받지 못하는가. 개혁을 코드화해 전유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은 아닌가.

더 우려되는 대목은 이미 일부 진보 진영에서 “(노 대통령에게) 배신당했다. 지금의 개혁은 이류도 못 된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4월 총선에서 개혁과 반개혁의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댈 것이다. 현 정부의 총선 ‘올인’ 전략과 이들의 주장이 서로 통하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개혁이 독점되면 우리 사회는 비난하는 집단과 말문을 닫는 집단으로 나뉜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예단하기 어렵지 않다.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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