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칼럼]재신임 '정치적 타결'의 조건

  • 입력 2003년 10월 20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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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이란 말이 꼭 맞다. 국민투표에서 대통령 재신임안이 가결되든 부결되든 이래저래 걱정이라는 얘기다.

부결된다고 치자. 12월 중순에 국민투표를 하고 내년 4월에 총선과 함께 대선을 다시 치른다면 넉 달 넘게 나라가 온통 선거바람에 휩싸일 것이다. 선거판에 최소한 수천억원이 들어갈 것이고 그 후유증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경제에 더욱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기야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새 대통령이 뽑혀 남은 임기 동안 나라를 잘 이끈다는 보장만 있다면 그 정도 국가적 손실은 감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들 그런 보장을 할 수 있겠는가.

가결된다고 치자. 노무현 대통령은 재신임을 받으면 국정을 쇄신하겠다고 하는데 그 말부터 논리에 맞지 않는다. 쇄신해야 할 국정이라면 당장 하고 재신임을 묻는 것이 도리이지 지금대로 끌고 가면서 재신임을 받겠다는 것은 그냥 ‘내 식대로’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국정 혼란의 주원인을 야당과 일부 언론에 돌리는 ‘네 탓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재신임은 오히려 ‘내 식대로’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 될 수 있다. 그래서야 남은 4년이 결코 순탄할 리 없다.

▼당장 국민투표하자더니 ▼

이러면 이래서 걱정이고, 저러면 저래서 걱정인 바에야 걱정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 중심은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길이냐는 데 모아져야 한다. 친노(親盧)냐 반노(反盧)냐를 떠나 무엇이 국가공동체를 위해 옳은 길인지,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최선(最善)을 구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차선(次善)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노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회의에 다녀온 뒤 정당 대표들과 만나 재신임투표건을 정치적으로 타결하겠다고 했다. 애초 빨리 국민투표라도 해서 재신임을 묻자던 야당측은 대체로 재신임투표 철회 요구 쪽으로 돌아섰다.

한나라당은 여전히 ‘선(先) 측근비리 의혹 규명, 후(後) 재신임’을 내세우고 있지만 국민투표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여러 여론조사 결과 재신임 쪽이 우세하게 나오는 ‘의외의 결과’ 앞에서 선뜻 국민투표에 응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민주당으로서는 호남의 ‘반(反)한나라당 정서’를 생각할 때 국민투표 자체가 치명적일 수 있다. 한나라당 대(對) 통합신당의 대결 구도에서 민주당이 설 자리를 찾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정치적 타결’의 밑그림은 대충 그려진 셈이다. 야당 주장대로 노 대통령이 재신임 건을 철회하면 된다. 통합신당은 국민투표를 하자는 입장이지만 그들 또한 정략적으로 말을 바꾼 데다 머릿수가 적어 큰 힘을 쓰기는 어렵다.

문제는 노 대통령이 야당 요구를 간단히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자신과 정권의 도덕성을 걸고 내놓은 재신임 건이 한마당 해프닝이 되어서야 대통령의 권위와 리더십은 그야말로 우스갯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 상황은 아예 물러나는 것보다 나쁠 수 있다. 여기서 정치적 타결이 필요하다. 야합이 아닌 타협을 하라는 것이다. 그게 정치다.

▼과감한 국정쇄신부터 ▼

정치적 타결의 조건은 첫째, 노 대통령은 청와대와 내각의 과감한 인적 개편을 통해 국정운영이 지금과는 달라지리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대통령 자문그룹조차 이미 국정쇄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둘째, 대통령 측근과 여야의 비리의혹은 검찰에 맡겨 엄정한 수사와 사법처리를 하도록 한다. 검찰 수사에 미진한 점이 있다면 야당의 국정조사 및 특별검사제 요구를 즉각 수용해야 하며 만일 대통령이 책임질 사안이 명백하다면 그것을 놓고 국회가 재신임 또는 탄핵 여부를 결정한다. 셋째, 근원적인 정치개혁안을 여야 합의로 이른 시일 안에 확정하고 실행한다. 이를 위해 일체의 정쟁(政爭)을 일단 중단한다.

5년 임기의 대통령이 1년도 안돼 재신임을 묻는 것은 그것이 가결되든 부결되든 국가적으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이 불쑥 재신임을 받겠다고 나선 것은 그 어떤 명분을 내세워도 ‘무책임한 승부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은 이래저래 걱정이다. 빨리 타협의 결론을 내야 한다.

전진우 논설위원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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