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진영/新4당체제의 덫

  • 입력 2003년 9월 23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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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이 없거나 극소수인 신4당 체제가 등장하면서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관계 정립이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노무현 대통령은 22일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에서 정국 상황 변화에 따른 대국회 관계 재정립 방안을 마련토록 지시했다. 정무수석비서관은 각 정당과의 사안별 정책협조가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여소야대를 자주 경험하는 미국의 행정부와 입법부 관계가 모델로 제시되기도 한다. 소수여당 체제에서의 국정운영에 따른 문제는 우리나라가 대통령제 정부형태를 유지하는 한 언젠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어떤 정치체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체제를 구성하는 정치제도들 사이에 정합성이 있어야 한다. 미국식 모델의 핵심적 요소를 생각해보자.

▼행정부와 입법부 갈등 소지 커 ▼

대통령제 정부형태에서는 대통령과 의회가 모두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이다. 대통령은 국정운영을 책임지되 의회의 견제를 받는다. 따라서 대통령이 속한 당과 의회 다수당이 다른, 이른바 ‘여소야대’ 또는 ‘분점정부’ 체제가 등장하면 대통령과 의회가 대립해 정치적 마비가 나타날 수 있다.

미국은 이런 문제를 두 가지 제도를 통해 극복해 나가고 있다. 첫째, 소선거구제에 기초한 양당제의 발전을 통해 분점정부의 출현 가능성을 낮춘다. 둘째, 예비선거 등을 통한 상향식 공천으로 정당의 위계구조를 약화시켰다. 그 결과 의원들은 의회 투표 때 대통령이나 정당 지도부의 지시가 아니라 지역구민의 의견을 존중하게 된다.

미국의 정치문화도 분점정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양대 정당간의 이념적 대립이 최소화돼 있고, 정부 정책을 지지한 의원들에 대해 정부가 해당 지역구 사업을 지원해 주는 것과 같은 보상의 교환이 일상화돼 있다. 정책사안별로 대통령이 의원들의 지지를 유도하고, 의원들도 지역구 이익에 따라 지지와 반대를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정치 상황은 미국식 모델이 작동할 수 있는 환경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 양당제가 다당제로 전환되면서 여소야대의 상황이 심화되고 고착화될 우려가 있다. 소위 코드정치 이념논쟁으로 정치세력간 이념적 차이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의 정치발전을 통해 이룩한 정당 내의 민주화와 내년 총선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도입될 전망인 상향식 공천제도가 원래 기대했던 효과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현실 정치를 도덕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도덕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주요 국정현안에 대한 선택이 ‘실리’보다는 ‘옳으냐 그르냐’라는 도덕적 판단에 따라 이뤄지는 경향도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이 정당을 뛰어넘어 정부 정책에 대해 찬반을 자유롭게 표시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 정치 현실은 ‘미국식 모델’의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그런 현상이 더 심화되는 느낌이다. 말이 앞서고 행동이 따르지 않거나 잘못된 행동을 그럴듯한 말로 해명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동북아 경제중심,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와 같은 구호가 벌써 허황된 것으로 들린다. 미국식 정부 및 언론관계,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싱가포르식 물류체계 등을 거론하고 있지만 그런 제도의 본질을 살리기보다 입에 맞는 측면만 부각시켜 편의적으로 활용하기 일쑤다.

▼청와대 총선겨냥 유도한 측면도 ▼

이번 4당 체제는 집권세력이 자초한 것이다. 내년 총선을 겨냥해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극소수 여당을 유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집권자가 책임 있는 국정운영을 위해 국회를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존중하고 국회의 견제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로 나갈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입장에서는 여론추수나 대중동원을 통해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리기 힘들 것이다. 이념논쟁으로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도덕주의로 상대방을 매도하려 한다면 정국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진영 경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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