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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22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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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대통령과 정당, 대통령과 총리 및 내각의 관계에서 신(新) 구(舊) 패러다임이 충돌해 파열음을 내는 경우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탈(脫) 권위주의와 리더십의 위기=당정분리가 실현되면서 여당을 통한 대통령의 입법부 지배나 1인 보스 중심의 정치관행은 거의 붕괴됐다. 노 대통령 스스로도 최근 들어 ‘힘없는 대통령’론을 말할 정도로 ‘제왕적 대통령’ 시대가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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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과도기적 변화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리더십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정부의 정책추진력이 약화된 것이 지금의 국정운영 난조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인 한-칠레간 협정이 올 2월 15일 체결된 이후 6개월이 지났는데도 국회 비준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 새만금간척사업 등 대형 국책사업 역시 이해당사자들간의 대립으로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정부의 조정기능은 작동되지 않고 있다.
정부 출범 초기 노 대통령은 직접 국회에 나가 시정연설을 하고, 여야 지도자를 잇달아 만나는 등 신선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행정부 역할에 전념하겠다고 밝히면서 정부와 여당이 갈등까지 빚고 있다.
심지어 건설교통부가 한나라당 의원들의 협조를 얻어 입법화를 추진했던 ‘국민임대주택건설 특별법안’은 여당인 민주당의 반대로 지난달 1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숭실대 강원택(康元澤·정치학) 교수는 “노 대통령이 탈권위에는 성공했지만 당정분리를 내세워 여당과의 관계를 사실상 단절하면서 정책추진력이 크게 약화됐다”고 지적했다.
탈권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대통령 권위의 실추’로 이어져 각종 갈등현안 조정과정에서 정부의 말이 먹혀들지 않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5·18 행사 후 노 대통령이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고 말하는 등 거친 발언을 함으로써 스스로의 위상을 추락시킨 점도 이런 현상에 한몫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노 대통령은 “현 정부의 1인자는 시스템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시스템에 의한 국정운영을 강조했으나 일부 386 핵심참모를 비롯해 ‘코드’에 맞는 인사를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정부 출범과 함께 제시한 ‘개혁 대통령-안정 총리’의 개념도 노 대통령이 현안에 직접 나서는 일이 잦고, 대통령과 총리간의 권한 분담 문제가 여전히 모호해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 있다는 평이다.
▽권력기관과 공직사회의 변화=노 대통령이 국가정보원 검찰 국세청 경찰 등 권력기관과 거리를 두면서 과거와 같은 권력기관의 사유(私有)화 현상은 상당히 누그러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정원의 국내 정보수집 기능이 축소되면서 권력기관간의 위상도 달라졌다. 청와대의 검찰 통제가 느슨해지면서 검찰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 그런 여파로 여당 대표가 검찰 수사를 받고, 여당이 검찰을 공격하는 상상하기 힘든 사건도 발생했다.
그럼에도 관료사회는 지금의 집권세력과 겉도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노 대통령이 ‘코드론’에 입각한 ‘개혁주체세력 구축’ 주장을 펴자 관료사회 내부에서는 ‘줄서기’를 요구하는 것 아니냐는 냉소적 반응이 나왔다.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386 핵심참모와 그렇지 않은 관료그룹의 화학적 결합이 이뤄지지 않는 바람에 관료사회 내부에서조차 ‘편 가르기’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별개로 공무원윤리강령이 5월부터 시행되고, 현 정부가 정권의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공직사회 내의 특권의식은 엷어져 가고 있다. 검찰의 한 간부는 “요즘에는 변호사와 저녁식사 한 끼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고 말했고, 국세청의 한 간부는 “룸살롱 구경한 지는 오래 됐고, 술자리가 불가피할 때는 양주를 갖고 다닌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대외관계에도 미묘한 변화 조짐=노 대통령이 동북아지역의 경제블록화 및 지역안보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구상을 내놓으면서 전통적인 한미동맹 관계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시아 강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내 386참모들을 중심으로 ‘자주외교’ ‘중국중시론’ 등이 강조되기도 했다. 미국 ‘자주국방론’ 역시 미군 재배치 문제와 맞물려 나온 구상이긴 하지만 미국의 역할에 대한 현 정권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일어날 수 있는 모든일이 벌어졌다”▼
“인사가 파격적인 것이 아니라 파격적으로 보는 시각이 타성에 젖어 있는 것이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월 27일 참여정부의 첫 내각명단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군수 출신의 40대 행정자치부 장관’ ‘첫 여성 법무부 장관’ 등을 ‘파격’으로 생각했던 국민은 갑자기 ‘타성에 젖은 인간’이 돼버린 셈이다.
이는 참여정부 6개월간 벌어진 수많은 전례 없는 사태의 속출을 예고한 대목이었다.
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념의 충돌과 가치의 혼란을 포함해 지난 6개월간 한국에서 생길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3월 20일 미국이 대이라크전을 벌이자, 노 대통령은 즉각 지지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며칠 뒤 한국군의 이라크전 파병을 결정했다. 그러나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라크전 반대’를 공식 의견서로 발표했고 이에 대해 노 대통령 자신은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에다 여당인 민주당의 주류 의원들은 정부의 파병안에 앞장서 반대했다. 국민은 ‘누가 여고 누가 야인지, 무엇이 국익인지’ 혼란을 겪어야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 합법화 문제는 지난 6개월 내내 논란이 됐다. 노 대통령과 정부는 ‘합법화’를 지향했지만 한총련은 노 대통령이 참석했던 광주 5·18 기념행사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8월 7일엔 주한미군 사격장 기습과 장갑차 점거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한총련 합법화 검토 문제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원인이 됐다.
한총련 사태와 각종 파업 사태로 얼룩졌던 5월 21일, 국정 최고책임자인 노 대통령의 입에선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발언이 터져 나왔다. 노 대통령은 8월 2일 국정토론회에선 비판언론을 강하게 성토하며 “하야하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대통령의 입에서 직접 나온 이 말들은 ‘엽기 청와대’란 세간의 평을 낳았다. ‘엽기 수석’으로 불리는 유인태(柳寅泰) 정무수석의 ‘× 같은 신문’ 등 거침없는 발언도 이런 평판에 한몫을 했다.
양길승(梁吉承) 전 대통령제1부속실장의 향응 파문은 현직 검사가 자신의 수사를 위해 몰래카메라를 동원하는 ‘엽기적 사태’로 번졌다.
법원의 새만금 사업 잠정 중단 결정에 사법 적극주의가 옳으냐 그르냐의 논란이 빚어졌고 이 과정에서 현직 농림부 장관이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아무런 사전 상의도 없이 사표를 내고 잠적한 사태까지 발생했다.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투신 자살은 대북 경협이란 숭고한 민족사업과 현대 비자금 정치권 유입이란 구시대적 권력형 비리의 틈바구니에서 발생해 아직도 사회적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며 “그러나 그런 충돌을 국가적 에너지로 모아내는 것은 대통령과 정치권이 할 일이다”고 지적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盧대통령-386에 던지는 前노사모 회장의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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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지인들이 나를 볼 때마다 묻는 게 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잘하고 있는 거냐?”
아마도 답답한 심정이거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일 게다.
지금도 나는 노 대통령의 탄생은 ‘노사모’를 비롯한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다수의 건강한 국민과 정통민주세력의 합작품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걱정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노 대통령의 지지도는 조금씩 떨어지면서 어느덧 40%대까지 와 있다. 지지도의 높낮이에 일희일비할 건 아니지만, 노무현의 승리로 정치혐오증에서 간신히 탈출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정치 냉소주의’로 돌아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든다.
국정운영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시도라든지, 또는 정부 권력기관의 분권이나 당정분리 등의 총론은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도와 시스템이 올바르다 해도 결국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좀 더 실무에 능하고 경험이 축적된 사람들을 기용하고 이들에 대해 세심하게 배려하는 자세가 아쉽다.
정치도, 정부의 운영도 모두 사람이 하는 것이다. 주변에 우호세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부의 정책은 힘을 얻게 되고 결국 이게 화합이라고 생각한다.
개혁의 주체가 남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의 허물만을 보려고 하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에 대해서는 다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자위하고 항변한다면 우군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치고 단죄하는 정치보다는 인정하고 끌어안는 정치를 하면 국민은 우리 편에 설 것이다.
아직까지 투박하고, 가끔 실수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노무현 정부를 도와주고 함께 가고 싶다.
노무현 정부는 앞으로 남은 4년6개월만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가 아니라 우리 국가사회를 변화시키고 업그레이드시키는 초석을 놓아야 하는 정부다. 시간이 흐른 뒤 ‘그래도 우리의 선택은 현명했어’라며 소주잔을 함께 기울일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김영부(金永扶 초대 노사모 회장·43·학원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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