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노무현 외교의 '북한 코드'

  • 입력 2003년 6월 11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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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이던 올 2월경. 노 대통령측은 “새 정부는 미국과는 ‘차별화’를 꾀하겠지만 일본과는 어느 정권보다 잘 지내고 싶다”는 뜻을 일본 정부측에 은밀히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정작 일본 조야(朝野)에서는 노 대통령 정부 출범 직후부터 새 정부의 외교노선이 ‘대륙(大陸) 지향’에 치우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한국 사정에 정통한 한 일본인 교수도 “노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 방일한 한 핵심 관계자로부터 ‘한국은 전통적으로 해양국가로부터 피해를 보아왔다. 새 정부는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할 것이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다”며 한국 새 정부의 외교노선을 ‘신(新) 민족주의적인 친중(親中) 독립노선’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일본측 시각의 바탕에는 노 대통령의 ‘외교 코드’의 핵심은 바로 북한이며, 그 연장선에서 한국 새 정부는 북한의 최대 우방이자 ‘큰형’인 중국을 중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바꿔 말하면 노 대통령의 5월 방미(訪美) 이후 ‘실용주의 외교노선’으로의 변신도 ‘상황돌파용’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깔려 있는 셈이다.

실제 이번 방일을 전후해 노 대통령은 이 같은 의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행보를 보였다. ‘북한이 위험하다는 생각자체가 오히려 위험하다’는 발언도 그렇지만, ‘일본 국민과의 대화’에서 우호관계를 돈독하게 해야 할 세 나라를 일본-중국-미국 순으로 꼽은 것도 말의 함의(含意)와 ‘속내’를 따져보는 데 익숙한 일본인들에게는 ‘역시 미국보다는 중국이 우선’이란 생각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연일(聯日)’이 됐든, ‘용미(用美)’가 됐든, ‘친중(親中)’이 됐든 새 정부의 모든 외교적 사고의 중심에 실제로 ‘북한’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의 생존이 걸린 북핵 문제나 통일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 남북관계라는 안경을 통해 대외관계 전반을 보다 보니 균형 잃은 행보가 가끔 나올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특히 노 대통령 주변의 참모들이 중국에 대해 지나친 친근감을 갖고 있는 것은 연 3억달러에 이르는 대북 지원을 조용히 계속하고 있는 중국이 ‘햇볕정책’의 실현에 가장 큰 우군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중요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주요 핵심라인에 외교전문가가 배제된 채 남북관계 전문가들만 포진해 있는 것도 참여정부의 ‘외교적 편향(偏向)’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노 대통령은 이번 방일 기간 중 ‘굴욕외교’란 비판을 들을 정도로 일본 국회의 유사법제 통과를 대범히 넘기고 ‘과거사 문제를 묻지 않겠다’는 식의 흔쾌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대북 대응과 관련해 일본을 우리 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쪽 ‘희망사항’과는 달리, 노 대통령의 방일이 끝나자마자 북한 선박의 단속에 나서 대북 문제에 관한 한 미국의 노선을 충실히 따를 것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보여주었다.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코드’가 아니라 ‘냉엄한 계산’임을 다시 한번 단적으로 보여준 실례다.

이동관 정치부 차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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