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후보가 걸어온 길]시련딛고 대세론 점화

  • 입력 2002년 11월 27일 18시 31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의 정치이력은 3김(金)과 얽힌 애증(愛憎)의 발자취였다. 긴장과 갈등으로 이어진 3김과의 정치함수는 역설적으로 그를 두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나서도록 한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30여년 동안 판사로 활동한 이 후보는 93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 의해 감사원장으로 발탁됐다. 국무총리까지 오른 것도 감사원장으로서 ‘성역없는 사정’을 주도하면서 얻은 개혁적 이미지가 발판이 됐다.

그러나 이 후보가 94년 4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총리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YS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이 후보는 재임 127일만에 총리직을 사퇴했다. 재임기간은 짧았지만, 그에겐 ‘대쪽 총리’라는 트레이드마크가 붙었다.

그가 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6년 전인 96년1월.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선대위의장으로서 15대 총선의 사령탑을 맡았다. 국정난조로 위기에 몰린 YS가 이 후보를 ‘정국 돌파카드’로 보고 다시 손을 내민 것이다. 총선 압승으로 그는 성공적으로 정치권에 데뷔했다.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선출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첫 대권 도전은 순탄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들 병역면제’라는 뜻밖의 암초에 부닥친 데다 김대중(金大中) 당시 국민회의 후보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재가 손잡은 ‘DJP연합’의 벽을 넘지 못했다.

대선 패배 후는 시련의 나날이 이어졌다. 이 후보를 겨냥해 총풍(銃風), 세풍(稅風), 병풍(兵風) 등이 휘몰아쳤다. 98년8월 한나라당 총재로 복귀한 그는 외풍에 맞서며 반 DJ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다. ‘반 DJ정서’에만 의지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그를 야당의 구심점으로 키워놓은 장본인은 DJ였다. 특히 이 후보가 ‘이회창 대세론’을 앞세워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설 수 있게 된 데는 DJ의 실정(失政)도 한몫을 했다.

한동안 이 후보와 불편한 관계였던 YS는 최근 이 후보 지지를 선언했고, DJ는 대선중립을 선언했지만 대립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JP의 심사는 여전히 ‘안개속’이다. 3김 정치 청산을 기치로 내건 이 후보가 새로운 정치를 열어갈 수 있을지 중대고비에 서있는 셈이다.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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