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각본대로 하는 대통령 간담회

  • 입력 2001년 11월 2일 18시 29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경남도민초청 오찬간담회에서 발언을 하려던 한 농민대표가 대통령경호실 직원들의 제지로 할말을 못하고 끌려나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국농민회 경남도연맹측이 청와대 경호관계자의 공식사과를 요구하는 등 말썽이 일고 있다.

김 대통령의 이날 오찬간담회는 260여명의 각계 대표들이 참석해 김 대통령과 함께 식사를 하고 대통령의 ‘격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되어 있을 뿐 참석자의 발언 순서는 아예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번 일은 어떻게 보면 대통령 순시 행사에서 간혹 발생할 수 있는 해프닝 성격이 없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 농민은 농민대표로 공식초청을 받고 참석한 데다 행사 전에 자신이 발언을 하겠다고 간곡히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후 사정을 감안해 보면 단순한 영웅심이나 과대망상증의 발로가 아닌, 김 대통령에게 쌀값 폭락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농민의 실상을 진지하게 알리려는 순수한 동기와 의도를 가졌던 것 같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행사를 방해하거나 또는 경호상의 문제를 일으킬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는 여러 가지 경호상 어려움이나 진행상의 문제점들이 돌발적으로 생길 수 있다. 그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도 중요하다. 그러나 행사 자체가 지나치게 경직되거나 형식적으로 흘러서는 오히려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번 경남도민 초청 오찬간담회도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각계 대표를 초청해 점심을 함께 하는 간담회라면 정부의 업적을 홍보하는 자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국민의 소리를 직접 들으며 민의를 파악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대통령이 민생의 현장을 보면서 국민의 ‘생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지방순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각본대로 환영사나 하고 ‘격려 말씀’만 듣는 자리라면, 그리고 질문을 해도 사전에 다 조정된 내용이거나 아예 그 같은 질문 순서도 없는 자리라면 간담회는 하나마나다. “대통령과 악수하고 밥 한번 먹은 뒤 자랑이나 늘어놓는 자리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농민대표의 항변이 그래서 더욱 실감 있게 들린다.

청와대측은 통상적인 관례에 따라 그 농민의 행동을 제지했다고 하나 그런 위협적이고도 경직된 자세라면 어느 시민이 대통령에게 솔직한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대통령에게 어떻게 솔직한 민초들의 얘기가 전달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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