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복원하자]땜질-뒷북처방 위기 더 키운다

  • 입력 2000년 9월 19일 19시 19분


정국이 위기 상황으로 치달을 때마다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은 정부 여당의 위기관리능력이다. 위기의 징후를 사전에 감지하고, 적시에 해법을 내놓음으로써 위기가 확대되지 않도록 하는 능력이 지금의 여권에는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행태가 ‘지각 대응’이다. 초기에 결단을 내려 문제점을 도려내고 치유하지 못하고 환부(患部)가 곪아터질 때까지 시간을 끌다가 결국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상황을 번번이 초래해 왔다는 것이다.

지난 한해 여권을 시달리게 했던 ‘옷로비 의혹사건’과 현 정국의 핵(核)으로 등장한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도 모두 지각 대응이 사태를 키웠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두 사건을 풀어가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해법도 비슷하다. 검찰 수사 결과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것이 김대통령의 소신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김대통령은 ‘옷 로비사건’의 주역이었던 김태정(金泰政)전법무장관을 끝까지 보호하려다 화(禍)를 자초했다. 사건의 시작은 단순했지만 관련된 여자들이 쏟아낸 꼬리를 문 거짓말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김대통령은 김전장관의 ‘결백’만을 믿고 인책 시기를 놓침으로써 결과적으로 치명적인 내상(內傷)을 입어야 했다.

한빛은행 사건을 보는 김대통령의 시각도 유사하다. 김대통령은 연루설이 나돌고 있는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 장관에 대해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드러난 게 없는 상황인 만큼 조사 결과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원칙론을 강조하고 있다. 민주당내에서조차 ‘희생양’이 필요한 시기”라는 여론이 비등하지만 김대통령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다.

경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고유가와 반도체 가격 하락, 포드의 대우자동차 인수 포기 등 악재가 겹쳐 금융시장이 혼란 상태에 접어들었는데도 정부는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위기 상황이 고유가 등 상당 부분 외생적 변수에 기인하고 있다고 해도 국제 고(高)유가구조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돼 왔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뒤늦게 “유가 인상을 통한 소비감축”이라는 방안만 제시하고 있다. 적어도 대다수 국민 눈에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실제보다 특정 사안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진념(陳稔)재정경제부장관은 19일 민주당 최고위원들과의 간담회가 끝난 뒤 “경제 펀더멘털이 나쁜 것은 아니고, 다만 거시경제가 제대로 가기 위해 체력 보강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했지만 국민이 이같은 견해를 얼마나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의약분업사태도 4개월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정부와 의사협회간 협상도 지지부진이다. 최선정(崔善政)보건복지부장관은 18일 민주당 최고위원 워크숍에서 “시간이 지나면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과연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여권의 위기관리능력 부재는 김대통령의 정치 스타일과도 관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김대통령은 한번 옳다고 판단하여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논리를 세우면 ‘U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또 모든 일을 직접 챙기다 보니 참모들과 관료들은 수동적이 되기 쉽다.

소수파 정권으로서의 한계와 어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위기의 원인을 밖에서 찾을 상황은 아니다. ‘위기에 더 기민하고 강한 정권’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심어 주지 않을 경우 정권 후반기도 이런 식의 끌려가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국민만 피곤해진다는 것이 여론의 보편적 인식이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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