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상봉 후유증…이산가족들 식음전폐

  • 입력 2000년 9월 9일 16시 49분


“여든살 꼬부랑 할머니가 된 누님의 얼굴에 고생이 훤히 비쳤는데 추석 명절에 제대로 먹기나 할는지. 남동생은 얼마나 몸이 아픈지…. 통 밥이 넘어가지가 않아.”

지난달 15일 평양에 가 큰 누님을 만난 박영일씨(76·서울 양천구 목동). 그는 누님 생각과 몸이 아파 상봉장에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만나지 못한 남동생 걱정에 돌아와서도 불면증에 시달리다 최근 겨우 평정을 찾았다. 하지만 추석이 다가오자 다시 마음이 심란해져 그만 몸져눕고 말았다.

8·15 남북이산가족 상봉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상봉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상봉한 지 한달 가까이 되지만 50년만에 만난 가족들 모습이 사진처럼 선명하고 만나기 전 그리움은 회한과 아쉬움으로 변해 가슴을 짓누른다.

남으로 내려온 가족을 만난 사람들보다 북으로 올라가 가족을 만난 실향민들의 허탈감과 후유증이 더 심한 편. 북한의 실상과 가족들의 초라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딸애한테 내 입던 옷까지 벗어 주고 왔어. 서울에서 듣던 것보다 사는 형편이 더 안 좋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픈데 추석이라고 뭐 하나 도와줄 수도 없고. 말하는데도 왜 그리 남 눈치를 보던지….”

세 살 때 헤어진 딸과 세 동생을 만나고 돌아온 김성옥씨(72·여·대전 중구 중촌동)는 “북의 가족들 얼굴이 꿈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며 “동생들 얼굴이 나보다 더 늙어 보여 가슴 한 쪽에 뭐가 걸린 듯 늘 답답하다”고 말했다.

북의 아내 송두옥씨(75)를 만나고 온 최경길씨(79·경기 평택시)도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며느리 문정숙씨(49)는 “아버님이 북에 다녀오신 뒤 말수가 많이 줄었고 음식도 잘 못 드신다”며 “어머님의 고왔던 얼굴이 너무 상했다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혼잣말을 하시곤 한다”고 전했다.

북에서 온 가족을 만난 상봉자들도 정도가 다를 뿐 사정은 비슷하다. 오빠 이내성씨(68)를 만난 KBS 아나운서 이지연씨(53)는 상봉 후 ‘바람이 빠진 공’처럼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고 고백했다.

“북한사람이 이제 ‘동포’가 아니라 ‘가족’으로 다가옵니다. 태풍이 지나간다는 뉴스가 나오면 잠을 못 자고 며칠 전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일행의 미국 방문이 무산됐다는 소식에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어요.”

이씨는 “오빠가 북에서 성공해 잘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명절이 다가오니 ‘함께 제사도 못 지내나…’하는 아쉬움으로 가슴이 더욱 아프다”고 말했다.

강북삼성병원 신경정신과 신영철과장은 “좋은 일이라도 충격이 올 경우 스트레스가 된다”며 “지나친 감정 표현이나 극도의 절제보다는 자연스럽게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도록 주위 사람들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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