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가 남긴것/무너진 신뢰]『법률미미』정치인떡값 면죄

  • 입력 1997년 5월 28일 20시 16분


한보특혜대출 및 金賢哲(김현철)씨 비리사건 재수사가 있기 전 한국사회에는 두 가지의 「합법적인 비리」가 통용됐다. 이른바 「떡값」과 「보험금」이 바로 그것. 이 둘은 그 실체가 불법적인 일반 뇌물과 다를 바 없고 사회적 폐해 역시 뇌물 못지 않지만 단지 「대가성(代價性)이 없다」거나 「공직에 오르기 전에 주고 받았다」는 이유로 사정(司正)의 칼날을 비켜갔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재수사팀은 이같은 형식논리를 과감히 깨고 떡값과 보험금에 대해 처음으로 형사처벌을 시도했다. 현철씨가 기업인들에게서 받은 「대가성 없는 활동비」 33억여원에 대해 조세포탈죄를 적용하고 시장선거를 앞두고 2억원을 주고받은 한보그룹 鄭泰守(정태수)총회장과 文正秀(문정수)부산시장에게 사전뇌물죄와 사전수뢰죄를 적용한 것이다. 이전까지 검찰은 수십억원의 돈을 받은 경우에도 구체적인 청탁이나 대가성이 확인되지 않으면 뇌물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을 포기했었다. 지난해 3월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張學魯(장학로)씨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 당시 검찰은 장씨가 지난 90년부터 기업인과 정당관계자 등에게서 모두 27억6천여만원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검찰은 그러나 이중 6억2천여만원에 대해서만 범죄혐의를 인정했다. 나머지 21억여원에 대해서는 「떡값이나 친교인사로 받은 용돈」이라는 이유로 기소대상에서 제외했다. 장씨는 덕분에 「사상 최고의 떡값」을 받은 인물로 공식 기록됐다. 물론 그 이전과 이후에도 정치인이 「떡값」 때문에 처벌된 적은 없다. 이 논리대로라면 현철씨가 기업인들에게서 받은 33억3천만원도 당연히 합법적인 활동비로 인정돼야 했다. 그러나 검찰은 적극적인 법해석을 통해 현철씨가 기업인들에게서 받은 돈을 증여로 보고 조세포탈 혐의로 현철씨를 형사처벌했다. 검찰은 그러나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에 대해서는 조세포탈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현철씨처럼 치밀한 돈세탁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 법조계에서는 검찰의 이런 태도에 대해 다소 실망감을 나타냈다. 嚴雲龍(엄운용)변호사는 『조세범 처벌법상의 「사기 기타 부정한 행위」에는 돈세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율이 높은 증여세를 피하기 위해 증여받은 부동산을 매수한 것처럼 꾸민 행위도 조세포탈로 본 대법원 판례도 있다. 정치인들이 현철씨처럼 치밀하게 돈세탁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돈받은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등의 부정행위를 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조세포탈여부를 더 따져봐야 했다』고 지적했다. 95년 6.27 지방선거 직전 정태수총회장에게서 2억원을 받은 문정수 부산시장을 사전수뢰죄로 기소하고 정총회장에 대해서도 사전뇌물혐의를 추가로 적용한 것도 정치권의 「보험금」 관행에 처음으로 처벌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뜻이 있다. 형법은 제129조 2항에 사전수뢰죄를 규정, 공무원이 될 자가 사전에 청탁을 받고 뇌물을 수수 또는 약속하는 경우를 처벌토록 하고 있다. 검찰은 아직 한번도 적용한 적이 없는 이 규정을 문시장과 정총회장에게 적용했다. 이로써 특정인이 권력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하고 미리 뇌물을 주거나 주기로 약속하는 이른바 「보험금」도 처벌할 수 있는 선례가 마련됐다. 검찰의 사전뇌물죄 적용은 특히 오는 12월 대통령선거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정인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생각하고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주면 사전수뢰죄로 처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 재수사팀의 적극적인 법해석과 적용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의 「떡값」이 제대로 처벌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총회장에게서 돈을 받은 것으로 밝혀진 정치인 32명중 8명만 불구속기소됐기 때문이다. 형사처벌이 면제된 정치인들은 증여세 추징과 「유권자의 심판」이라는 처벌에 맡겨지게 됐다. 검찰이 발견해낸 조세포탈도 냉정히 말하면 「처벌을 위한 처벌」에 불과하다. 뇌물의 성격이 있는 떡값을 그 성격에 따라 처벌한 것이 아니라 「별건(別件)」으로 처벌한 셈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뇌물죄의 구성요건인 「청탁」이나 「대가성」에 대한 검찰 및 법원의 관대한 해석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검찰 내부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된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기업인이 돈을 줄 때는 다 청탁이나 대가관계 때문에 주는 것인데 검찰이나 법원이 이 개념을 너무 소극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뇌물죄로 처벌되지 않는 떡값의 범위를 넓게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車炳直(차병직)변호사는 『형법상의 뇌물죄는 법원의 판례로 볼 때 직무관련성이나 청탁 또는 대가성이 입증돼야 적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의 떡값이 피해갈 여지가 있다』며 정치자금법을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수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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