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응팔’이 따로 있나… 情 타고 흐르는 동네 수다 방송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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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공동체라디오 ‘동네FM’

소출력공동체라디오 관악FM에서 트로트 가수 이진아(왼쪽), 김영이 씨가 성인가요를 소개하는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소출력공동체라디오 관악FM에서 트로트 가수 이진아(왼쪽), 김영이 씨가 성인가요를 소개하는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빨리 편집하자. 나 바쁘단 말이야. 조금 있으면 애들 학교도 끝나고.”

“알았어. 그럼 여기까지는 살리고…. 대추야자 부분도 재미있었어. 거기도 살리자.”

지난달 16일 오후 서울 관악구의 한 빌딩 지하. 책상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 좁은 방에서 두 여성의 손길이 바쁘게 움직였다. 회색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방에는 마이크와 컴퓨터 2대, 녹음용 믹서, 책장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헤드폰을 쓴 채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했다. 30분쯤 지났을까. 서늘했던 방 안 공기가 금세 따뜻해졌다. 반면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는 머그컵에서 조용히 식어 갔다.

“다 됐다. 이제 방송 예약만 걸면 돼.” 1시간가량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던 두 여성은 비로소 헤드폰을 벗으며 큰 숨을 내쉬었다. 46세 동갑내기인 김혜련, 이성진 씨. 이들은 평범한 가정주부다. 그리고 동시에 지역 라디오 방송국의 DJ 겸 작가 겸 PD다.

‘아프리카의 음식’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이들의 목소리는 7일 뒤 전파에 실려 세상에 울려 퍼졌다. 2km를 넘기 어려운 고작 1W(와트)의 출력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마을 구석구석까지 조용히 스며들었다.

관악FM에는 정년퇴직 뒤 라디오 방송에 뛰어 든 이종대 씨를 비롯해 필리핀 결혼이주여성 에이미 씨, ‘단짝 친구’인 최돈인 최영자 할머니 등(왼쪽부터) 다양한 계층의 주민들이 DJ로 참여하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관악FM에는 정년퇴직 뒤 라디오 방송에 뛰어 든 이종대 씨를 비롯해 필리핀 결혼이주여성 에이미 씨, ‘단짝 친구’인 최돈인 최영자 할머니 등(왼쪽부터) 다양한 계층의 주민들이 DJ로 참여하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소출력 라디오, 1W의 세계

두 사람이 일하는 곳은 관악소출력공동체라디오FM방송국(관악FM). 관악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 라디오다. 공동체 라디오는 작은 출력(1W)으로 제한된 지역에 방송되는 지역 밀착형 방송을 뜻한다. 2005년 9월 첫 전파를 타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출력이 작다 보니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범위도 그만큼 좁다. 1W의 출력은 장애물이 없으면 최대 5km까지 뻗어나갈 수 있지만 건물이 많은 도시 지역에선 1∼2km 내에서만 방송을 들을 수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운영 중인 공동체 라디오는 관악FM을 비롯해 광주FM 공주FM 마포FM 성남FM 성서FM 영주FM 등 총 7곳. 이들 방송국은 저마다 지역의 소식을 중심으로 문화와 가요 여행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방송국들은 모두 지역 소식을 공통적으로 다룬다. 여기에 지역 특성에 맞춘 개성 있는 프로그램으로 무장했다. 예를 들어 지역에 다문화 가정이 많은 관악FM은 이주민을 직접 DJ 겸 PD로 채용해 다문화 가정의 소식과 한국 정착 팁을 소개한다.

서울 홍익대와 합정동 인근을 기반으로 한 마포FM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홍익대 앞 인디밴드의 음악을 소개한다. 전남대와 가까운 광주FM은 전남대 학생이 DJ로 참여해 음악과 영화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주위에 산업단지가 많은 대구의 성서FM은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에 집중한다.

성서FM의 이영수 PD(47·여)는 “주민들이 DJ로 참여할 때엔 그들이 원하는 주제로 마음껏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하는 편”이라며 “지역 특색을 살리면서 주민이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다 보니 올해 시청자 미디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타는 등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관악FM의 상근 PD와 기자들이 스튜디오 앞에서 활짝 웃고있다. 왼쪽부터 박현숙 기자,  박현진 PD, 김기욱 본부장, 김우신 기자, 강민건 PD.
관악FM의 상근 PD와 기자들이 스튜디오 앞에서 활짝 웃고있다. 왼쪽부터 박현숙 기자, 박현진 PD, 김기욱 본부장, 김우신 기자, 강민건 PD.
청취자가 곧 진행자, 내가 만드는 라디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셨죠? 오늘은 1인 밴드 강백수 씨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 볼게요.”

지난달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마포FM.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미모의 여성 DJ가 능숙하게 방송을 시작했다. 그는 밴드 ‘82번지점프’의 보컬인 슈비 씨(31)다. 마포FM의 청취자이자 인디밴드의 멤버로 활동하던 슈비 씨는 지난해 마포FM의 한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DJ 활동을 시작했다.

“음악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참여했다가 마포FM PD님이 말하고 노래 부르는 것을 보더니 DJ로 일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서 합류했어요.”

이날 마포FM을 방문한 인디가수 강백수 씨(28) 역시 마포FM DJ 출신이다. 그 역시 마포FM의 한 음악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참여했다가 마포FM에 1년간 몸담았다. 강 씨는 “인디 뮤지션들에게는 자기 음악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부족해 소출력 라디오가 큰 힘이 된다”며 “방송을 할 때에도 청취율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소개하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알릴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소출력 라디오의 특징 중 하나는 누구나 방송국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이와 성별, 직업은 물론이고 국적에도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소출력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신의 방송을 할 수 있다.

전문 방송인과 예술가를 비롯해 가정주부와 은퇴한 중장년, 외국인 노동자, 학생 등이 소출력 라디오의 DJ와 PD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직접 대본을 쓰고 녹음을 한 뒤 편집과 편성(예약된 시간에 방송에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작업)까지 맡는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소출력 라디오에서 일할 수 있는 이유는 소출력 라디오만의 독특한 인력 운용 방식 때문이다. 소출력 라디오는 대부분 영세하다. 이 때문에 최소한의 인력만 상근직으로 두고 나머지 실무 부서는 ‘무보수 자원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꾸려 나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원활동가는 소출력 라디오를 즐겨 듣는 청취자들이다.

꿈을 키우는 방송

광주 북구에 자리한 광주FM에서 방송을 만드는 30명의 자원활동가 중 절반가량은 전남대 학생들이다.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학생들이 교대로 방송에 참여하고 있다. 자원활동가를 제외한 상근직은 방송국 대표와 행정 및 편성을 맡은 PD 두 명이다. 김재홍 광주FM PD(32)는 “평소 광주FM의 방송을 듣는 전남대 학생들이 방송국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직접 프로그램도 만든다”며 “학생들이 제작하는 지역 소식과 음악,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 인기”라고 말했다.

외국인들의 참여도 활발하다. 1994년 한국인과 결혼해 서울에 정착한 루마니아 제니포프 씨(44·여)는 관악FM에서 ‘세상의 모든 아줌마들’을 제작하고 있다. 제니포프 씨는 루마니아 출신 이주민을 위한 한국 정착 노하우와 국제결혼 에피소드 등을 방송에 담는다. 이태원의 한 음식점에서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방송국에 나와 한 시간 분량의 목소리를 전파에 띄운다. 그는 “청취자들과 같이 울고 웃으며 방송에 보람을 느낀다”며 “취미로 삼을 만큼 재미도 있다”고 말했다.

아나운서나 PD 등 방송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소출력 라디오는 꿈의 ‘인큐베이터’다. 비록 소규모지만 방송의 현장에서 꿈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임하나 씨(26·여)도 대학생 시절부터 소출력 라디오에서 방송인의 꿈을 키웠다. 임 씨는 2013년부터 소출력 라디오의 DJ로 일했다. 현재는 경제 전문 뉴스를 다루는 케이블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활동 중이다. 방송인의 꿈을 이뤘지만 그는 여전히 한 주에 한 시간씩 소출력 라디오의 녹음 부스에 앉는다. 그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가급적 오래 소출력 라디오에서 일하고 싶다고 전했다.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데 직접 책을 고르고 원고를 쓰는 데 시간이 만만찮게 걸려요. 하지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가는 방송국에서 내가 일정 부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보람 있죠.”

경영난은 숙명, 수익성 확보가 관건

소출력 라디오의 가장 큰 목표는 ‘생존’이다. 3년에 한 번 방통위로부터 재허가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재정 안정성과 조직 인력 등 경영 적정성이 심사 항목에 포함된다. 재허가 여부는 둘째 치고 매년 방송국을 운영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소출력 라디오 직원들은 월 100만 원이 안 되는 봉급을 받는다. 그나마 방송국마다 5명 안팎에 불과한 상근직들만 해당된다. 적게는 30명 많게는 150명에 이르는 자원활동가들은 무급으로 일한다. A방송국 관계자는 “생계를 꾸려 나가기 힘들 만큼 적은 돈을 받는다”며 “소출력 라디오 상근 직원들 가운데 남자 직원이 거의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수익 모델 역시 마땅치 않다. 광고 수입은 거의 없고 대부분 후원과 지방자치단체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자원활동가로부터 오히려 ‘후원금’을 받는 방송국도 있다. 마포FM은 자원활동가들로부터 월 1만 원의 후원을 받는다. 박영구 마포FM PD(28)는 “활동하는 분들에게 미디어를 같이 만들어 간다는 취지에서 후원을 받는다”며 “방송국의 결정에 함께 참여하며 후원의 의미를 살리고 있다”고 말했다.

소출력 라디오를 이끌어 가는 주민 DJ와 PD들은 환경은 어렵지만 ‘동네 방송국’의 가치와 힘은 퇴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록 전봇대와 건물에 부딪쳐 마을의 경계 밖으로 뻗어 나가기 어려운 1W의 소출력이지만 마을 주민이 언제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전파에 실을 수 있는 작은 라디오의 가치를 지켜 나가겠다는 설명이다.

박현진 관악FM PD(27)는 “라디오 녹음 부스에 앉아 주민 모두가 행복한 얼굴로 방송에 임하는 걸 보는 게 보람 있다”며 “더 많은 지역 주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방송국의 문을 늘 열어두겠다”고 말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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