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첫 양장 디자이너 노라노 “84세… 요즘도 단골 옷 만드는, 나는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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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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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회고전 ‘라비앙 로즈’

노라노 여사는 미간 주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과정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 때문에 찌푸릴 일도 없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노라노 여사는 미간 주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과정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 때문에 찌푸릴 일도 없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88세까지 작업한 코코 샤넬보다 더 오래 디자인을 하겠다고 농담하곤 했어요. 그런데 샤넬은 중간에 15년을 쉬었고, 저는 평생 옷을 손에 놓은 적이 없으니 제가 이미 경력으로는 샤넬을 이긴 거죠?”

10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학동사거리 ‘노라노 부티끄’에서 만난 디자이너 노라노(본명 노명자·84) 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심플한 블랙 재킷에 커다란 목걸이, 짧은 커트머리…. 아무리 봐도 여든을 넘겼다고 보기 어려웠다.

한국 최초의 양장패션 디자이너로 국내 첫 패션쇼를 열고 미국 뉴욕에도 진출한 노 여사는 요즘도 단골 고객을 위해 옷을 만드는 ‘현역’이다. 그는 “근육이 옷을 만드는 일에 적응했는지, 작업할 때에는 몸이 전혀 아프질 않다가 일이 끝나면 등이 쑤시곤 한다”고 말했다.

노 여사는 60년이 넘는 패션 인생을 후배 디자이너들과 함께 되돌아보는 특별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23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호림아트센터 JNB갤러리에서 1950년부터 최근까지의 작품을 선보이는 ‘라비앙 로즈’(장밋빛 인생) 전시회를 연다. 기획과 홍보 모두 패션계 후배들이 자청해 마련했다. 유명 스타일리스트 서은영 씨, 디자이너 강희숙 씨, 정구호 제일모직 상무와 기아자동차, 코오롱스포츠의 디자이너들이 참여했다.

노 여사의 역할은 단골 고객들로부터 옷 기증 받기다. 그는 “할머니부터 증손녀까지 4대째 노라노 옷을 입는 고객이 옷을 기증했고, 다른 고객의 조카가 물려받은 1950년대 ‘아리랑 드레스’(한복 느낌의 드레스로 노라노의 대표작 중 하나)도 꼭 되돌려주기로 하고 빌려왔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1959년 미스 유니버스대회에서 오현주 씨가 입었던 드레스, 1967년 가수 윤복희 씨가 입은 미니 원피스(사진), 뉴욕 메이시스백화점 쇼윈도에 진열되고 미국 전역에서 팔렸던 원피스 등도 선보일 예정이다.

노 여사가 ‘노라노’로서 삶을 시작한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다. 한국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 씨의 딸로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낸 노 여사는 경기여고에 다니던 1944년 일제의 위안부 징집을 피하기 위해 부모님이 정해준 대로 결혼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전쟁과 광복, 시댁의 냉대를 겪으며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1947년 미국 유학을 떠나며 여권에 적은 영어이름이 ‘노라’다.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에 나오는 여주인공 노라에서 따 왔다. 노 여사는 1949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 2층을 개조해 의상실을 연 뒤 지금까지 쉴 틈 없이 옷을 만들어 왔다.

그는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 가서도 미싱을 샀다”며 “전쟁통에 옷을 살 사람이 무용수밖에 없어서 무대의상을 맘껏 만들었다”고 말했다.

노 여사의 손엔 60년 동안 핀을 꽂고 가위질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는 “목적이 뚜렷한 야망은 좌절되면 스트레스를 주지만 도전은 실패해도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야망 대신 도전하며 하루하루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며 “후계자의 미국 진출을 도우며 할 수 있을 때까지 옷을 만들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노라노#라비앙 로즈#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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