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래는 그동안 무엇을?]'자기정치' 절감 7월초 사무실내

  • 입력 1999년 10월 26일 20시 58분


이강래(李康來)전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게 있어 2월 서울 구로을 보궐선거 공천탈락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45세의 젊은 나이에 권력의 핵심요직인 정무수석까지 올랐던 이전수석의 ‘고속승진’은 당시 정치권 안팎의 화제가 됐고, 결국은 이런저런 구설(口舌)에 휘말려 내정됐던 공천마저 ‘뒤집기’를 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는 공천탈락 직후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끊은 채 설악산 제주도 지리산 등지로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손을 대지 않았던 골프를 시작했다.

공천후유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이전수석은 7월초 서울 여의도 라이프 콤비 오피스텔 501호에 개인사무실을 내고 자신의 진로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했다는 것이 측근들의 얘기다. 측근들은 “그 당시 이전수석이 공천탈락의 후유증에서 겨우 벗어나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며 “공천탈락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 이전수석은 ‘그림자’나 ‘참모’가 아닌 ‘자기정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무실에는 정무수석 시절 보좌관이었던 양재원(梁在源)씨와 여직원 1명이 출근했지만 양씨마저 8월에는 사무실을 떠나 지금은 김상진 전비서관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진로에 대한 이전수석의 고민은 한동안 계속됐던 듯하다. 그는 정무수석 시절 자신이 데리고 있었던 직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했지만 주로 서울대 행정대학원 동창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가 16대 총선에서 자신의 고향인 전북 남원출마를 굳힌 것은 9월초. 이전수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원에 사무실을 냈으며 열흘에 한 번 정도 서울에 올라올 정도로 고향출마에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이전수석에 대해 갖고 있는 신뢰감이나 양자간 관계를 감안하면 사무실을 낸 뒤 언론대책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권 내에서는 이전수석이 공천탈락 이후 청와대 및 국민회의와 거리를 두고 있었고, 이렇다 할 당직을 맡지 못한 채 신당창당과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그가 정치현안 등에 깊숙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고 보고 있다.

또 그와 비교적 가까웠던 이종찬(李鍾贊)전국가정보원장이나 신건(辛建)전국정원2차장 등도 5월 현직에서 이미 물러난 상태여서 ‘야인(野人)’이었던 그가 김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전달할 통로 자체도 마땅치 않았으리라는 게 여권 인사들의 주장이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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