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현지]‘기업은 사회의 것’ 실현할 성숙도가 관건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26일 23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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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미래전략연구소 사업전략팀장
김현지 미래전략연구소 사업전략팀장
‘한국 기업사(史)에 보기 드문 기업 지배구조 모범생’으로 불리던 유한양행의 최근 행보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 견제와 균형을 통한 성장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이루기 힘든 것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유한양행 창업주 고(故) 유일한 박사는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는 이념 아래 창업주 일가는 재단 일에만 관여하고 경영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소유 경영 분리 구조를 확립했다. 유한재단은 유한양행의 최대주주이자 공익재단이다. 회사가 수익을 많이 내면 재단에 돌아오는 배당도 많아진다. 재단을 통해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구조다.

창업주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유한양행은 독특한 최고경영자(CEO) 승계 방식을 만들었다. 대표이사 사장은 3년 중임만 허용된다. 회장직은 창업주와 그의 오른팔이었던 연만희 고문 퇴직 이후 사라졌다. 권력이 특정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 유한양행이 이번 주주총회에서 회장·부회장 직제를 부활시켰다. 조욱제 유한양행 대표는 “세계 시장에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내수 중심 회사가 세계 시장으로 나가려면 장기적 관점의 과감하고 신속한 투자와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임기가 정해진 대표이사 사장이 대형 투자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연구개발(R&D) 분야에서 우수 인력을 선제적으로 유치하려 해도 번번이 주주총회를 개최해야 하는 등 민첩한 경영활동에 현행 정관이 걸림돌이 된다면 정관을 바꾸는 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회사의 도약을 위해 회장 직제가 필요하다는 조 대표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회사 안팎에서는 의구심에 찬 눈길이 쏟아진다. 회장 직제가 현 지배구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강한 리더십의 폐해를 조심해야 하는 일이 적지 않다. 경영자의 독단이 경영에 반영될 가능성이 높고 잘못된 결정에 대해 견제장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회사는 사지로 몰릴 수 있다. 올해 1월 회사 매각으로 60년 오너 경영의 막을 내린 남양유업이 대표적이다.

사실 어떤 지배구조가 좋은 지배구조인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기업마다 제반 여건이 다르고 이상적 지배구조를 구축한 것 같더라도 경영 환경이 달라져 지배구조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오기도 한다.

어떤 방식이든 중요한 것은 ‘책임 경영’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최상의 제도를 찾아가는 일이다. 각 기업에 맞는 지배구조를 찾는 데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포스코는 민영화 이후 24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신임 회장이 취임사에서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로 꼽는 게 지배구조 개선이다. 1995년 민영화, 2008년 금융지주 설립으로 지배구조를 바꿔온 KB금융지주 역시 여전히 이사회의 공정성과 투명성 확보 방안을 고민한다.

기업 지배구조에 관한 한 어떤 제도적 틀을 만드는 일은 그 틀을 만든 취지를 실천하기 위해 기업 구성원의 성숙도를 끌어올리는 일의 시작점이라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엔 부단한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유한양행의 이번 실험이 많은 이의 우려를 딛고 또 다른 모범적 지배구조의 본보기가 되길 기대한다.


김현지 미래전략연구소 사업전략팀장 nuk@donga.com
#기업#사회#성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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