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의 죽음[이준식의 한시 한 수]〈236〉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2일 2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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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말과 무소 갑옷으로 무장한 반란군이 지축 흔들며 쳐들어오자,
황제는 양귀비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자신 또한 결국엔 재가 되었지.
군왕으로서 진작 그녀가 나라 망칠 줄 알았더라면,
황제의 가마 굳이 마외(馬嵬) 언덕을 지나 피란 갈 일 있었겠는가.
(冀馬燕犀動地來, 自埋紅粉自成灰. 君王若道能傾國, 玉輦何由過馬嵬.)


―‘마외(馬嵬)’ 제1수·이상은(李商隱·812∼858)


당 현종이 총애한 양귀비가 죽음을 맞은 건 안녹산의 난 직후 피란길에서였다. 그녀의 죽음에 얽힌 역사의 기록. 피란 이틀째, 황제 일행이 마외 언덕길에 다다르자 호위하던 금군(禁軍)이 ‘반란의 화근’인 귀비를 죽이지 않으면 발길을 떼지 않겠노라고 했다. 이에 황제도 어쩌지 못하고 귀비와 결별을 고했고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귀비를 불당으로 데리고 가 목을 졸랐다.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시인은 마외 언덕에서의 변고를 떠올리며 미색에 취해 국사를 망친 현종을 호되게 질타한다. 군주로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을 경계했다면 난리를 초래하지도, 또 피란길에 나설 필요도 없지 않았냐는 것이다. 연작시로 된 제2수의 풍자는 더 신랄해서 ‘왜 사십여 년이나 황제 노릇을 했으면서, 아내 막수(莫愁)를 챙겨준 평민 노씨보다도 못한가’라고 했다.

한편 양귀비에 대한 시인 묵객들의 찬사, 황제와의 비극적 사랑을 안타까워한 노래도 넘쳐나는데, 그중의 백미(白眉)는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 시인이 장장 840자를 할애하여 저들의 사랑을 동정하고 찬양한 장편 서사시다. 양귀비를 ‘후궁 미녀 삼천 명이나 되지만, 삼천 명 받을 총애를 한 몸에 다 받았다’라 묘사했고, ‘하늘과 땅 장구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이들의 한(恨) 면면히 이어져 끊일 날 없으리라’며 그 애틋한 사랑을 못내 아쉬워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양귀비#죽음#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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