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의 클래식感]베르디와 푸치니의 가교가 된 ‘머리 헝클어진 자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3일 23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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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가 은사 폰키엘리의 소개로 스카필리아투라 예술가들과 오페라 흥행사 리코르디를 만난 코모 호수 주변의 모습.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푸치니가 은사 폰키엘리의 소개로 스카필리아투라 예술가들과 오페라 흥행사 리코르디를 만난 코모 호수 주변의 모습.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이달 초 이탈리아 북부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명사인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오페라 세 편을 관람했다. 5일 파르마 레조 극장의 베르디 오페라 축제에서 본 ‘일 트로바토레’는 무대 뒤편의 이글거리는 화면이 계속 배경을 바꾸면서 작품의 음울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생생히 전달했다. 7일 같은 곳에서 관람한 ‘1차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은 전쟁 장면의 앙상블을 휘어잡은 프란체스코 란질리오타의 지휘가 발군이었다. 8일에는 베네치아의 라페니체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포스카리 가문의 두 사람’을 보았다. 여주인공 루크레치아 역 소프라노 아나스타샤 바르톨리가 알토를 연상시키는 낮은 공명점부터 압도적인 최고음까지 쏟아내는 볼륨감은 귀를 사로잡았다.

11일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밀라노 북부 코모 호숫가의 아름다운 풍광을 돌아보았다. 이 호수 주변은 1860∼1880년대 이탈리아 문화계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예술가 그룹 ‘스카필리아투라’의 근거지였다. 얼마간 낯설게 들리지만 이탈리아 오페라 제왕의 지위가 베르디에서 푸치니로 승계되는 데는 이들의 역할이 컸다.

스카필리아투라는 ‘머리 헝클어진 자들’이라는 뜻이다. 기존의 권위에 저항하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작가 겸 평론가, 작곡가 아리고 보이토가 주도했던 이 그룹은 초기에 베르디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들은 이탈리아 문화계의 중심이었던 베르디나 작가 만초니가 ‘낡고 퇴행적인 예술’에 머물러 있다며 독일과 프랑스의 선진적 예술에서 영감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도 베르디의 역량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운동이 주장만 무성할 뿐, 베르디에 버금가는 걸작을 실제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이토는 베르디의 중기 실패작인 ‘시몬 보카네그라’를 개작하자고 베르디에게 제안했으며 공동 작업은 성공을 거뒀다. 이어 보이토는 베르디의 마지막 두 오페라인 ‘오텔로’와 ‘팔스타프’의 대본을 맡았다.

이 시기 이탈리아 음악계는 고민을 안고 있었다. 나이 먹은 베르디가 ‘아이다’(1871년) 이후 ‘오텔로’(1887년)까지 16년 동안이나 새 작품을 내놓지 못하자 이탈리아 청중이 프랑스 오페라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 스카필리아투라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자코모 푸치니(1858∼1924)였다.

푸치니가 1883년 밀라노 음악원 졸업연주회에서 유명 지휘자 프랑코 파초의 지휘로 선보인 ‘교향적 기상곡’은 음악평론가 필리포 필리피의 찬사를 받았다. 파초와 필리피는 보이토의 뒤를 이은 스카필리아투라의 핵심 인물이었다. 푸치니는 음악원 재학 시절부터 강의보다는 콘서트홀과 악보점에서 만나는 새로운 흐름의 외국 음악에 관심을 기울인 청년 작곡가였다. 스카필리아투라 그룹의 파초와 필리피는 그런 푸치니의 작품에서 자신들이 갈망했던 ‘알프스 너머 선진 음악’의 냄새를 맡았다.

음악원 재학 시절 푸치니의 은사인 작곡가 폰키엘리는 푸치니가 졸업하자 그를 코모 호수 주변 스카필리아투라 예술가들의 별장에서 열리는 주말 회합에 데리고 다녔다. 폰키엘리가 푸치니에게 소개해준 인물 중에는 베르디의 소속사이자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흥행 회사였던 카사 리코르디의 실질적 경영자 줄리오 리코르디가 있었다. 은퇴와 다름없는 베르디의 활동 중단으로 가장 고민이 깊었던 인물도 리코르디였다. 그는 푸치니의 첫 오페라 ‘빌리’가 초연되자 즉각 그를 자사 소속으로 영입하고 이 ‘베르디 후계자’의 대대적 홍보에 나섰다. 푸치니는 세 번째 오페라 ‘마농 레스코’부터 이어진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의 대성공으로 신뢰에 값했다.

2024년은 푸치니가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의 마지막 2중창과 피날레 장면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서울시오페라단이 26∼29일 ‘투란도트’를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는 것을 비롯해 푸치니의 걸작들이 국내 무대에서도 잇따라 공연될 예정이다. 이 기념의 시기를 맞아 베르디와 푸치니의 가교 역할을 했던 예술가그룹 스카필리아투라의 고민이 잊히지 않길 바란다. 오늘날 우리에게 예술계의 앞날을 고민하며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는 창작자, 평론가, 흥행사들의 열띤 토론이 있는지도 상기해보고 싶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머리 헝클어진 자들#19세기 말#예술가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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