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김현수]134년 前 ‘자주 외교’ 꿈을 실현하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9일 23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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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워싱턴 옛 대한제국 공사관에서
기술력이 바로 외교력임을 깨닫다

김현수 뉴욕특파원
김현수 뉴욕특파원
요즘은 줄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니하오(你好·중국어로 안녕하세요)’ 하며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묻는 서양인이 꽤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법도 하지만 우리는 정색하고 정정해 주는 경우가 많다. “아이 엠 코리안.”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발언 후폭풍이 거센 것은 복잡한 국제 정세를 떠나 이런 국민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지만 감정이 상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5000년 동안 우리를 침략하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이웃 나라들을 상대하면서 “위 아 코리안”이라고 당당히 외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워 왔다.

지난해 찾은 미국 워싱턴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도 어쩌면 “우리는 조선 사람”이라며 몸부림친 흔적이다. 조선 정부가 1889년 워싱턴 금싸라기 땅 건물을 구입해 이전한 곳이다. 1887년 고종이 주미 공사를 파견하려 하자 청나라는 ‘속국 조선이 단독으로 외교 공관을 설치할 수 없다’며 거세게 반대했다. 고종은 미국과 직접 교류할 때는 청나라 관리를 대동하거나 보고하기로 약속하고 나서야 초대 공사 박정양을 파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 도착한 박정양은 호기롭게 청나라 공사를 건너뛰고 그로버 클리블랜드 당시 대통령에게 고종의 국서를 전달했다. 자주 외교 꿈을 키우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며 꿈은 사라지고 만다.

공사관 건물은 비극적 공간이지만 미국 한인에게는 꼭 방문해야 할 명소다. 자주 외교에 대한 조상의 의지와 염원뿐 아니라, 한국 정부가 2012년 공사관 건물을 사들여 역사를 재현한 과정을 보며 고국의 저력에 긍지를 느낄 수 있다. 싱 대사 발언을 들으며 이 공사관을 떠올린 까닭이다.

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에 휘말린 것처럼 현재 한국은 미중 갈등을 큰 축으로 하는 지정학적 대변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다. 반도체나 2차전지 같은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글로벌 ‘경제 안보’ 전쟁에서 한국은 든든한 협상 패를 쥔 주요 플레이어다. 국가 간 전략 갈등이 경제 보복으로 표출되는 흐름을 감안하면 우리는 전략무기를 갖춘 셈이다.

2016년 중국의 사드 보복도 자국 기업이 대체할 수 있는 소비재에 집중됐을 뿐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분야는 건드리지 못했다. 2019년 일본은 한국 반도체 소재 공급망에 타격을 주려 했지만 국내 기업의 발 빠른 대응으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한국 주요 기업의 해외 투자 확대는 각국 정·재계 핵심 인사와의 네트워크를 탄탄히 하는 역할을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초기 백신 수급에 비상이 걸리자 삼성이 화이자와 협상한 것이 대표적이다.

다른 나라와의 갈등을 최대한 피해 우리에 대한 경제 보복을 최소화한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해 기술력 격차를 유지하고 회복탄력성 높은 공급망을 강화해야 한다. 협상력 없는 외교는 힘이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를 만난 데에는 MS가 미래 첨단산업을 이끌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선두 업체 오픈AI 주요 투자자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술력이 곧 협상력이라는 방증이다.

미중이 고위급 교류를 재개하기로 했다. 공분(公憤)보다 힘, 즉 기술력과 전략 산업을 키우는 일이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길임을 깨닫는다. 134년 전에는 허망하게 끝난 자주 외교의 꿈이 계속 뻗어 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임무다.


김현수 뉴욕특파원 kimhs@donga.com
#자주외교#기술력#외교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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