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쉬운 돈’의 대가 안 치르고 넘어가려는 한국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4일 00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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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금리는 기축통화국의 말기적 증상
미국 따라 내린 금리로 부채 키운 한국
금리 올릴 때는 미국만큼도 못 올려
자산거품 꺼지기도 전에 다시 부푼다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부의장을 지낸 앨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경제학 교수가 쓴 ‘미국의 통화·재정사(A Monetary and Fiscal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961∼2021’이 지난해 나왔다. 이 책은 벤 버냉키와 그 후임인 재닛 옐런의 저금리 정책이 빚은 결과를 다루고 있는 데다 통화정책만이 아니라 재정정책까지 조망하고 있어 돈 풀기에 중독된 미국의 모습을 역사적 맥락에서 그려 볼 수 있게 해준다.

버냉키와 옐런은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대공황’에 입각해 통화정책을 폈지만 실은 자처하는 케인스주의자다. 다만 기존 케인스주의자들이 재정정책으로 돈을 퍼붓는 주의라면 이들은 ‘재정정책 받고 통화정책 더’로 곱절로 퍼붓는 주의라는 점이 차이다. 둘은 제로금리로도 모자라 양적완화(QE)까지 해가며 돈을 공급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라는 방식으로 장기간의 저금리를 예고함으로써 경제주체들이 과도한 리스크에도 손해 보지 않는 세상을 만들었다.

블라인더는 공급측 정책으로 불리는 감세정책도 케인스주의에 반한다고 보지 않는다. 레이건, 아들 부시, 트럼프 때의 감세 정책은 재정 악화를 동반했다는 점에서 케네디, 존슨, 닉슨, 포드, 카터, 오바마, 바이든 때의 경기부양 정책과 다를 바 없었다. 케네디부터 지금까지 건전한 재정정책을 편 대통령은 아버지 부시와 클린턴밖에 없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복지라는 형태의 경기부양으로, 또 한편으로는 감세라는 형태의 경기부양으로 국가부채를 아이젠하워 시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도록 불려 왔다. 반복되는 ‘재정절벽’ 위기는 그 결과다.

‘닥터 둠’으로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명예교수의 ‘초거대위협(Megathreats)’도 지난해 나왔다. 그는 실패한 통화정책으로 인한 천문학적 부채를 미국을 위협하는 요소로 꼽는다. 미국은 지난 40년 동안 거품 붕괴로 인한 충격에 한결같이 더 쉽게 빌릴 수 있는 돈(easy money)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대응해 왔으며 그 최종 귀결이 제로금리다.

1960, 70년대 케네디-존슨의 민주당 정부와 닉슨-포드의 공화당 정부가 앞다퉈 푼 돈은 1980년 전후 볼커가 21%까지 끌어올린 금리로 흡수할 수 있었으나 이후 그린스펀, 버냉키, 옐런이 통화정책으로 푼 돈은 정부 기업 가계에 심각한 부채를 쌓아 5%대 금리만으로도 은행들이 파산할 정도여서 파월에게는 그 이상의 금리 인상이 버거운 실정이다.

세계적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설립자인 레이 달리오는 2021년 ‘변화하는 세계질서(The Changing World Order)’라는 책에서 이런 사태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돈을 찍어내는 목적은 부채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the goal of printing money is to reduce debt burden).” 헤지펀드를 운영해 막대한 돈을 벌어 본 사람으로서 오늘날 왜 리스크를 감수하는 쪽이 무조건 돈을 버는지 비법을 고백한 셈이다.

이 책은 ‘국가 성쇠의 이유’라는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다. 기축통화국은 예외적인 차입력(borrowing power)과 지출력(spending power)을 바탕으로 너무 많이 빌리고 너무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 중앙은행이 제로금리를 유지하고 부채 만기를 연장해주면 채무자는 상환 없이 공짜로 돈을 계속 쓸 수 있다. 이런 현상이 금융위기로부터 코로나 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일어났고 역사의 다른 시기에도 기축통화국이 쇠퇴하던 때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국은 기축통화국도 못 되면서 미국이 금리를 낮출 때는 질세라 따라가며 부채를 방조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금융통화위원회는 정부로부터 독립해 있으나 연준으로부터는 독립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가. 미국이 금리를 올릴 때는 한미 금리 차가 역대 최대로 벌어지는데도 인상을 서둘러 동결했다. 실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경제’에 매달린 정부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의 규율이 무너진 미국만큼도 ‘쉬운 돈’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 하니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벌써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물가 상승은 자산 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에 감내할 만했다. 앞으로는 물가 상승이 지속되면서 자산 가격도 상승할 것이다. 진짜 고통스러운 인플레이션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제로금리#기축통화국#자산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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