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끝난 노정희, 본인만 모른다
MB 사면, 불행한 매듭 묶은 文 풀어야
靑 이전, 졸속이나 ‘약속’ 의미 일깨워

전임 선장은 ‘한 번도 못 가본’ 항로로 배를 몰았다. 자칫 한국호가 난파(難破)할 뻔했다. 그럼에도 후임 선장이 항로를 바꾸지 못하도록 배의 키를 묶어둘 태세다. 그것도 모자라 봉급은 많고 할 일은 많지 않은, 꿀 빠는 자리에 자기 사람을 듬뿍 ‘알박기’ 하고 있다. 그러면서 ‘떠나는 날까지 인사권은 내게 있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의 권력 내려놓기 과정에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높다고는 하나 어차피 떠나는 권력이다. 문 대통령보다 퇴임 지지율이 한참 높았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나 메르켈 독일 총리도 후임자를 배려해 길을 비켜주는 아름다운 퇴장을 하지 않았나.
대통령부터 이러니 ‘문재인 사람들’의 낯 두꺼운 알박기는 보너스다. 김오수 검찰총장의 처신은 두고 볼 여지가 있지만, 노정희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어떤가. 그래도 한국 민주주의를 이만큼 지켜온 선거관리위원회의 전통에 오물을 끼얹으면서도 수치를 모른다.
중앙과 지방의 선관위를 움직이는 상임위원이 모두 20명이다. 이들 중 15명이 물러나라고 했으면 선관위 수장으로선 이미 끝난 거다. 다 끝났는데 본인만 모른다. ‘앞으로 잘할 것’이라고 했다는데, 앞으로 잘할 사람을 위해 비켜줘라. 그것이 또 다른 오욕(汚辱)을 더는 길이다.
5년 전 이맘때, 촛불의 겨울을 지낸 많은 국민은 새로 출범하는 문재인 정권에 대한 기대로 가슴 뛰었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기대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의 결과는 ‘한 번도 경험 못한 나라’ ‘두 번 경험해선 안 될 대통령’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본인이나 주변의 흠결은 있더라도 안보를 튼튼히 하고 국부(國富)를 늘리는 ‘국익의 대열’에서 벗어난 분은 없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외교 안보 경제 재정 에너지 노동 교육 시민사회 정책은 물론 법치와 국민화합 등 국정 전 분야에서 국익을 자해(自害)하는 통치를 해왔다. 국정의 구석구석에서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했으면 이제 내려놓을 때도 되지 않았나.
마지막에라도 문 대통령이 내 편의 지지율보다 역사의 평가를 중시하는 대통령다움을 보였으면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이명박(MB) 전 대통령 사면 문제를 정리하고 갈 필요가 있다. MB는 문 대통령 임기 전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달리 임기 중 구속됐다. 아무리 반대 여론이 있더라도 떠나는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 묶은 불행한 역사의 매듭을 풀고 가는 게 순리 아닐까.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나 민정수석 폐지 같은 당선인 공약에 청와대가 왈가왈부하는 것도 가당찮다. 그런 점에서 ‘여기 안 쓸 거면 우리가 그냥 쓰면 안 되나’라며 윤 당선인을 조롱한 비서의 경박한 언동에 대통령이 경고한 건 당연하다.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선언이 졸속으로 이뤄진 감이 있지만,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윤석열의 몫이다. 다만 식언(食言)으로 얼룩져 신뢰 잃은 한국 정치에서 잊혀진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법언(法諺)을 새삼 일깨워준 건 평가할 만하다.
문 대통령 퇴임까지 49일. 당선인 측과 청와대가 기싸움을 벌이는 듯한 풍경 자체가 생뚱맞다. 이제 주연 자리를 윤 당선인에게 물려주고 커튼 뒤로 물러서야 할 시간이다. 통 크게 당선인에게 권한을 이양하라. 마지막 날까지 인사권을 내세워 알박기 하려 든다면 경남 양산 사저로 떠나는 뒷모습도 어쩐지 초라해 보일 것 같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