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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박제균 칼럼]실패한 대통령의 권력 내려놓기

입력 2022-03-21 03:00업데이트 2022-03-2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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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끝까지 인사권’ 무리한 알박기
다 끝난 노정희, 본인만 모른다
MB 사면, 불행한 매듭 묶은 文 풀어야
靑 이전, 졸속이나 ‘약속’ 의미 일깨워
박제균 논설주간
대한민국호(號)의 선장이 바뀌었다. 그런데 전·후임 선장의 만남 자체가 무산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역대 전임 대통령들이라고 승리의 기쁨에 ‘오버’하는 당선인 측에 기분 상하는 일이 없었을까. 그래도 별 잡음 없이 만남이 성사된 건 떠나는 분이 들어오는 분에게 한수 접어주었기 때문이다. 잘잘못을 가리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지만, 이런 사달이 난 데 전·후임 중 누구 잘못이 더 큰지는 말 안 해도 다 안다.

전임 선장은 ‘한 번도 못 가본’ 항로로 배를 몰았다. 자칫 한국호가 난파(難破)할 뻔했다. 그럼에도 후임 선장이 항로를 바꾸지 못하도록 배의 키를 묶어둘 태세다. 그것도 모자라 봉급은 많고 할 일은 많지 않은, 꿀 빠는 자리에 자기 사람을 듬뿍 ‘알박기’ 하고 있다. 그러면서 ‘떠나는 날까지 인사권은 내게 있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의 권력 내려놓기 과정에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높다고는 하나 어차피 떠나는 권력이다. 문 대통령보다 퇴임 지지율이 한참 높았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나 메르켈 독일 총리도 후임자를 배려해 길을 비켜주는 아름다운 퇴장을 하지 않았나.

웬만해선 떠나는 권력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 정치 담당 기자의 상도의(商道義)라면 상도의다. 비판의 대상은 권력이지,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웬만하지 않은 것 같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권력을 최후의 순간까지 거머쥐려는 모습은 안타깝다.

대통령부터 이러니 ‘문재인 사람들’의 낯 두꺼운 알박기는 보너스다. 김오수 검찰총장의 처신은 두고 볼 여지가 있지만, 노정희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어떤가. 그래도 한국 민주주의를 이만큼 지켜온 선거관리위원회의 전통에 오물을 끼얹으면서도 수치를 모른다.

중앙과 지방의 선관위를 움직이는 상임위원이 모두 20명이다. 이들 중 15명이 물러나라고 했으면 선관위 수장으로선 이미 끝난 거다. 다 끝났는데 본인만 모른다. ‘앞으로 잘할 것’이라고 했다는데, 앞으로 잘할 사람을 위해 비켜줘라. 그것이 또 다른 오욕(汚辱)을 더는 길이다.

5년 전 이맘때, 촛불의 겨울을 지낸 많은 국민은 새로 출범하는 문재인 정권에 대한 기대로 가슴 뛰었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기대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의 결과는 ‘한 번도 경험 못한 나라’ ‘두 번 경험해선 안 될 대통령’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본인이나 주변의 흠결은 있더라도 안보를 튼튼히 하고 국부(國富)를 늘리는 ‘국익의 대열’에서 벗어난 분은 없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외교 안보 경제 재정 에너지 노동 교육 시민사회 정책은 물론 법치와 국민화합 등 국정 전 분야에서 국익을 자해(自害)하는 통치를 해왔다. 국정의 구석구석에서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했으면 이제 내려놓을 때도 되지 않았나.

마지막에라도 문 대통령이 내 편의 지지율보다 역사의 평가를 중시하는 대통령다움을 보였으면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이명박(MB) 전 대통령 사면 문제를 정리하고 갈 필요가 있다. MB는 문 대통령 임기 전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달리 임기 중 구속됐다. 아무리 반대 여론이 있더라도 떠나는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 묶은 불행한 역사의 매듭을 풀고 가는 게 순리 아닐까.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나 민정수석 폐지 같은 당선인 공약에 청와대가 왈가왈부하는 것도 가당찮다. 그런 점에서 ‘여기 안 쓸 거면 우리가 그냥 쓰면 안 되나’라며 윤 당선인을 조롱한 비서의 경박한 언동에 대통령이 경고한 건 당연하다.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선언이 졸속으로 이뤄진 감이 있지만,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윤석열의 몫이다. 다만 식언(食言)으로 얼룩져 신뢰 잃은 한국 정치에서 잊혀진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법언(法諺)을 새삼 일깨워준 건 평가할 만하다.

문 대통령 퇴임까지 49일. 당선인 측과 청와대가 기싸움을 벌이는 듯한 풍경 자체가 생뚱맞다. 이제 주연 자리를 윤 당선인에게 물려주고 커튼 뒤로 물러서야 할 시간이다. 통 크게 당선인에게 권한을 이양하라. 마지막 날까지 인사권을 내세워 알박기 하려 든다면 경남 양산 사저로 떠나는 뒷모습도 어쩐지 초라해 보일 것 같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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