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제왕적 행태 그대로, 장소만 바뀌는 ‘광화문 청와대’는 안 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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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이전, 보수·진보 폭넓은 공감… 구중심처(九重深處)에서 광장으로
시간표에 쫓기다간 복병 만날 우려… ‘불통’ ‘권위주의’ 행태 바꾸는 게 중요

천광암 논설실장
천광암 논설실장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윤석열 당선인의 공약인 청와대 이전을 1호 사업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새 집무실은 광화문에 있는 정부서울청사로 굳어지는 중이다. 살림집에 해당하는 관사 후보지로는 삼청동 총리공관과 안전가옥 등이 거론된다. 임기 첫날부터 정부서울청사로 출근하겠다는 당선인의 의지가 확고해, 5월부터 ‘광화문 대통령 시대’가 열릴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이전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대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해온 공약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과 2017년 등 두 번의 대선에서 광화문 이전을 약속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같은 공약을 내걸었다.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오래전부터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돼온 셈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은 ‘복병’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윤 당선인은 1월 27일 공약을 처음 내놓으면서 청와대 이전이 필요한 이유로 ‘불통(不通)의 공간 배치’를 꼽았다. 윤 당선인은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비서동에서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본관까지 차를 타고 가지 않느냐”면서 “이런 구조에서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한 것이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를 중심으로 참모들의 사무실이 다닥다닥 밀집해 있는 미국 백악관이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지금은 청와대 비서동 안에 대통령 집무실이 만들어져 있어 마음만 먹으면 참모들과 넥타이를 풀어 제치고 토론을 할 수 있다. 현 정부 들어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청와대 본관’은 의전용 공간이 됐고, 비서동 안에 있는 집무실이 주(主) 집무실이 됐다. 대통령이 구중심처(九重深處)를 버리고 광장으로 나온다는 상징의 무게는 논외로 치고, 당장 청와대를 뛰쳐나와야만 미국식 소통이 가능한 건 아니다.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옮기는 데는 근접 경호 외에도 군사적 대비 등 복잡한 위기관리 문제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일본은 우리 대통령보다 격이 떨어지는 총리의 관저(집무 공간)를 신축하는 데도, 검토부터 완공까지 27년이 걸렸다. 제대로 하려면 그만큼 검토할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다. 안보와 안전의 문제는 1000가지를 검토했어도 하나를 놓치는 데서 큰 구멍이 생긴다.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는 문제는 ‘임기 첫날 출근’이라는 시간표에 당선인이 스스로를 구속시킬 이유가 없다.

문 대통령은 공약뿐 아니라 취임사에서도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했으나 임기 중 이를 백지화했다. 윤 당선인으로서는 ‘문재인이 못 한 일을 윤석열은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권 교체를 바라고 표를 던진 민의에 답하기 위해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

취임 첫해만 해도 ‘유리알 소통이다’, ‘오바마보다 잘한다’는 칭송을 들었던 문 대통령이 불통과 독선의 상징으로 추락한 것은 집무실 이전 공약을 백지화해서가 아니다. 보여주기 ‘쇼통’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청와대가 정부 부처 위에 군림하면서 모든 인사와 정책을 마음대로 주무른 제왕적 행태가 문제였다.

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 있었던 정책실을 부활시키고 장하성 실장, 반장식 일자리수석, 홍장표 경제수석, 김수현 사회수석, 김현철 경제보좌관 등 ‘코드사단’을 집결시킨 뒤 힘을 실어줬다. 이들이 정책사령탑 행세를 하면서 쏟아낸 작품들이 소득주도성장, 공급을 배제한 부동산 수요 억제, 탈원전 등 경제 참사로 이어진 정책들이다.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주무부처의 장관은 의사결정에서 완전히 배제됐고, 공직사회는 청와대의 눈치만 살피는 복지부동이 체질화했다.

윤 당선인이 문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인원 30% 감축’ 공약처럼 작고 스마트한 청와대를 만드는 일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집무실 이전 시간표에 쫓겨 경호, 의전, 시민의 교통 불편, 비용, 관련 법률의 정비 등 복잡한 실타래를 푸는 데 매달리다가 권위주의와 불통, 권력 남용 등 ‘비서정치’의 폐단을 바로잡는 일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청와대의 오랜 독주(獨走)에 ‘좀비화’한 일선 정부 부처들이 책임감을 갖고 스스로 일을 하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도 시급하다. 제왕적 행태를 그대로 두고, 일하는 공간만 바뀌는 ‘광화문 청와대’는 안 된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윤석열#인수위#청와대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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