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우정엽]백신 집착에 흔들린 외교의 품격

우정엽 객원논설위원·세종연구소 미국센터장 입력 2021-05-25 03:00수정 2021-05-26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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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회담 앞두고 불거진 백신 지원 여부
미국 시각에선 이상하게 비친 ‘백신 집착’
성장한 한국 위상에 맞는 외교 논의 필요
우정엽 객원논설위원·세종연구소 미국센터장
한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한미 정상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시절 축소되었던 동맹의 의미와 역할을 정상 궤도로 다시 올려놓았다. 트럼프 대통령 4년 동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의 동맹국들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애를 먹었다. 미국이 트럼프 집권 기간에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집권기에 미국의 국격에 대한 평가가 떨어진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은 개별 국가와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이익을 얻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한미동맹을 미국의 안보 서비스 제공이라고 본 그의 최대 관심사는 방위비 분담금 규모였다.

그러한 트럼프식의 외교에 4년간 시달렸기 때문일까?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 내부에서 나온 이야기는 ‘트럼프식 계산’에 기초한 경우가 많았다. 대북 정책에서 보다 많은 미국의 선제적 조치를 이끌어내는 대신 우리가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얼마만큼 협조 의사를 보일 것인가 하는 정도의 이야기는 그나마 우리의 외교적 고민이 담겨 있었다. 문제는 백신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서였다.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많은 피해자를 내고 있을 때 우리는 적극적인 국민의 방역 협조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를 적게 입었다. 올 초 본격적으로 백신이 보급되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는데, 아무리 감염자의 수가 적다 하더라도 백신 접종이 늦어지면 정상적으로 사회를 되돌리는 시간이 늦춰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일 감염자 수가 우리보다 많아도 빠른 속도로 정상적인 경제 및 사회생활로 돌아가고 있는 이유는 백신 접종 덕분이다. 미국의 상황과 대비되면서 정치권에서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백신을 확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러한 공방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에서 백신을 좀 얻어올 수 없느냐’ 하는 문제로 이어지고 말았다.

정부는 백신 수급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했지만, 백신 수급에 문제가 있다는 전제하에 진행된 미국으로부터의 백신 지원 논의는 반도체와 배터리 협력이 그 대가로 등장하는 수준까지 진행되었다. 백신과 반도체는 교환 대상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우리 기업의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 대미 협력이 백신 지원 여론 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하여 그러한 기대에 기름을 끼얹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6000만 회분에 더해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 2000만 회분을 국제사회 지원에 사용하겠다고 밝히자,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국에는 어느 정도 지원할 것이냐의 문제로 이어졌고, 500만 회분, 1000만 회분과 같은 헛된 기대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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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국내 논의는 미국 내에서 매우 이상하게 받아들여졌다. 회담을 앞두고 필자와 이야기를 나눈 미국 전문가들은 정상회담에 대한 한국의 최대 관심사가 미국으로부터의 백신 지원이라는 데 놀랐고, 한국에서 그 대가로 반도체와 배터리 투자를 생각한다는 데 더 크게 놀랐다. 방역 성공을 자부하고 백신 확보에 충분한 자금을 가지고 있는 한국이 미국에 백신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맞느냐고 하면서, 미국이 생각하는 백신 협력은 쿼드 백신 파트너십에 나온 것처럼 저소득 국가들에 대한 백신 지원에 동맹 등 우방국이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일본이 자금과 저온 운송기술 등을 저소득 국가에 지원하기로 한 것과 같은 형식을 의미했다.

미국 기준에서 볼 때 한국이 백신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전혀 한국의 국가 수준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에 더해 미국에 반도체와 배터리 투자를 대가로 제공한다는 것은 한국 수준에 의문을 더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 투자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한국 정부가 민간 기업의 투자를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의 5G 중국 부품 사용이 문제가 될 때 민간 기업의 문제라는 논리를 폈던 것도 꼬집었다.

이번 회담은 여러모로 한미 동맹의 공고함과 미래 지향적 면모를 과시했으나, 아쉬움도 진하게 남는다. 햄버거가 아닌 크랩케이크가 제공됐다고 해서 우리를 특별히 생각했다고 하기보다 이러한 백신 논의가 한국의 품격에 얼마나 타격을 주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 적어도 외국은 그렇게 보고 있다. 그에 걸맞은 외교가 곧 우리의 품격이 될 것이다.

우정엽 객원논설위원·세종연구소 미국센터장
#백신 집착#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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