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이토록 짧은 계절[이재국의 우당탕탕]〈45〉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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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 가을이 지나면 또 1년을 기다려야 돼. 당신 인생에 가을이 몇 번이나 남았겠어! 얼른 나가자.”

토요일 모처럼 늦잠을 자려고 누워 있는 나에게 아내가 잔소리를 퍼부었다. 누워서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는 겉옷을 챙겨 입고 아내를 따라나섰다. 경춘국도는 단풍을 즐기러 가는 차량들로 가득했다. 한 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은 경기 포천시의 운악산 입구. 우리는 주차를 하고 각자 생수를 한 통씩 사서 가방에 넣고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끔씩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쓴 채, 방역수칙을 잘 지키며 등산을 하고 있었다. 중턱 즈음 올랐을 때 ‘딱딱딱딱’ 소리가 나서 나무를 올려다 보니 딱따구리 한 마리가 벌레를 잡아먹느라 나무를 쪼아대고 있었다.

아내가 빨간 단풍잎을 하나 주워 들더니 나에게 물었다. “가을이 되면 왜 단풍이 드는지 알아? 책에서 봤는데, 겨울이 오기 전에 나뭇잎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모두 뿌리에게 주느라 색이 다 빠지는 거래. 그러니까 나뭇잎이 빨갛게 물드는 게 아니라 어쩌면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는 걸 수도 있겠네.”

그러고 보니 단풍잎들이 마지막까지 최후의 노력을 다해 울긋불긋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어른들 흰머리 나는 것도 비슷한 거 아닐까?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한테 에너지 다 주시느라 흰머리 수북하게 빛나시는 거고, 우리 흰머리 나는 거 너무 서글퍼하지 말고 멋지게 받아들이자.” 나는 감상에 젖었는데 아내는 이미 자리를 떠나 산을 오르고 있었다.

현등사에서 올려다보는 운악산이 절경이었다. 현등사 삼층석탑 앞에 유독 가족들이 많길래 왜 그런가 봤더니 현등사에 재밌는 이야기가 있었다. 조선 영조 때 강릉에 살던 한 총각이 과거 시험을 보러 가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현등사에 들러 밥을 해 먹었는데, 법당 안에 부처님이 내려다보는 모습에 부처님 앞에 밥 한 그릇을 떠 놓으며 “이거 드시고, 시험이나 합격하게 해 주시오” 부탁을 했다. 그리고 한양에 가서 과거 시험을 봤는데, 결과는 낙방. 그 총각은 다시 현등사에 와서 “밥만 얻어먹고, 합격도 안 시켜주고! 너무한 거 아니오!” 괜히 법당 안에 부처님께 화풀이를 하고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 “이놈아! 내가 언제 밥 달라고 했느냐. 시험공부도 제대로 안 해놓고 요행이나 바라고! 왜 나한테 화풀이냐, 이놈아!”

총각은 꿈이 너무 생생해서 그길로 강릉 집에 와서 아버지께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아버지께서 “부처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이 재물은 너 결혼할 때 주려고 했는데, 이걸로 좋은 일부터 해야겠다.” 그 총각은 주변에 좋은 일도 하고, 현등사에 찾아가 3년간 공부를 한 끝에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총각의 사연을 들은 영조 임금께서 현등사에 ‘대선 급제사’라는 편액을 내려주었다. 그래서 수능을 앞둔 자녀와 부모가 삼층석탑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던 것 같다.

그렇게 가을을 온몸으로 느끼고 내려와 운악산 입구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손두부와 청국장을 시켜 먹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계산대에 커다란 예수님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래, 절 앞이라고 꼭 불교신자만 장사하란 법은 없지.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재국#이재국의 우당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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